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열렬한 팬이다. 고오를 임신하고 10개월 동안 그의 책을 수십 권 읽으며 베르나르 태교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생과 과거와 현재와 우주를 넘나드는 그의 상상력을 흠모하고 사랑한다. 인생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철학과 시선이 경이롭다. 그러다 드라마'도깨비'를 보고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을 때의 감정선이 이어져 전생과 지금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가족의 죽음과 계속 이어가는 삶. 보통의 인생이라면 모두가 겪는 흥망성쇠. 그리고 결혼과 출산. 좌절과 실패와 슬픔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양념이고 주어진 숙제 들인 것이다. 그걸 맛보고 풀어내며 살아가는 게 바로 인생이지 않을까? 원래부터 긍정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까지 장착하니 더 많은 운이 따라왔다.
대학에서 도예를 만나기 전까지 난 그림을 그리는 분야에서 일을 하며 살거라 생각했었다.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등 간판집에서 명함 디자인하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붓을 드는 것을 좋아했고 미대를 가기 위해 버스가 끊기기 직전까지 대입미술학원을 다니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도자기작품에는 칼러가 빠지지 않고 어떤 기법 이로든 새겨져 있다.
그렇게 그림만이 세상 전부로 알았던 내가 흙에 반하고 아이들에 반하다 보니 그림도, 도자기도, 아이들까지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쟁이가 되어버렸다.
그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 바로 '아동도예미술학원'이었다. 하지만 꿈만 꾸고 있었지 여전히 새는 구멍이 큰 우리 집 사정으로는 나의 학원을 차린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인을 만났다. 가게를 접는데 계약기한이 안되었으니 그냥 들어와 공방을 차려보라는 지인의 제안.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시작 당시 인테리어 할 여유가 없어 폐업한 학원에서 주워온 잡기들로 주섬주섬 채워 넣었다. 온 식구가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달려들어 오빠의 솜씨로 칸막이를 하고 중고 가마를 넣게 되었다. 몇 달 동안 아파트마다 다리가 통통 붓도록 층층이 전단지를 돌렸다. 사하구내 어린이집, 유치원 주소 열람으로 도자기 단체수업 프로그램을 우편으로 보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홍보를 해 나갔다. 그렇게 모집한 6명으로 시작해 1년 뒤 나의 도예미술학원은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혼자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은 40명 가까이 모집이 됐고 저녁엔 일반인 도자기수업을 이어나갔다.
그 수강생 중 한 분이 중학생 선생님이셨는데 그분 덕분에 중학생 대상 도예특강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알음알음 소개로 중학교, 장애인 복지관 도예특강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모두가 나를 위해 애써주셨다.
하지만 난 계속 달렸다. 공휴일마저 요리특강이나 야외활동으로 아이들에 과 함께 했고, 부모님이 바쁘신 고학년들과 모여 영화도 같이 보러 갔다. 30대 초. 내가 젊었었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으며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게 신났던 시절이었다.
30 중반을 넘어 아이를 낳고 주 2회 홈스쿨을 이어갔다.
그래도 겨우 주 2회 하는 수업일 지라도 엄마라는 신분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마법 같은 시간을 만끽했다. 날이 좋으면 아이들과 캔버스를 들고 야외스케치를 하고 비 오는 날엔 팬케이크를 구워 먹으며 그렇게 아이들과 열정 가득한 숨을 쉬며 살아갔다.
그러다 미술 홈스쿨도 전문 프랜차이즈에게 밀리고 예체능보다 공부열이 높아져 미술이 쇠퇴의 길을 갈 때쯤 새로운 귀인이 찾아왔다.
난 홈스쿨을 하면서도 주민센터에서 도예강사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몇 번 마주친 낯이 익은 정도의 지역 주민. 그날도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공방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 키운다고 공방을 꾸리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슬슬 알아볼까 해요 "라는 나의 대답에 봄날의 햇살 같은 말씀. "그럼 부네치아 공방모집 공고 떴던데 한 번 알아봐요"
그 한 마디에 사하구청 공고란을 찾아보고 이틀을 남기고 밤새 사업계획서를 적어 극적으로 서류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40세 미만 청년대상 사업장지원 프로젝트'
난 대상자가 아니었다. 마음은 청년 못지않은데... 나이가 많으니 기회도 없는 거구나. 하지만 될 수 없었다면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말 그대로 귀인. 결국 지원자 미달로 서류통과 후 면접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로 업체 중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당당히 부네치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껏 부네치아에서 공방을 운영 중이다.
밤늦게 아파트 주차장을 들어서면 이중 주차자리도 없는 만차인 상황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내가 들어서면 한 자리가 꼭 남아있거나 고맙게도 나를 위해 바로 나가는 차가 있다. 그런 날 보고 남편은 항상 신기하다고 말한다. 남들은 열 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일들이 나에겐 차를 못 대는 날이 열 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니 말이다. 그렇게 분명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나에겐 쉽게 흘러갔다. 막혀서 쩔쩔매고 있을 때 꼭 도움의 손 길을 내주는 이가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좌절과 실패를 당연히 만난다. 하지만 난 그 모든 나쁜 상황들이 결국엔 좋은 결과로 돌아온 다는 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사람이라 좌절도 짧고 원망도 길지 않다. 그저 헤쳐나갈 일에 집중하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명언이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인데, 왜냐고?
내가 살아남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