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5. 일본어를 습득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 채 오기 전이었다.
고오와 단둘이 일본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평일 비행기표가 싸게 떠서 그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것. 꼭 가야 했다. 평소 여행 준비를 번잡하게 여겨 패키지여행만 고수하던 내가, 숙소며 동선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는 자유여행을 감행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지난 여름방학이었다.
어느 날 고오 방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혼잣말을 하며 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톤이 바뀌는 걸 보니 여느 때처럼 역할놀이를 하는 듯했는데 이상하게도 들리는 말이... 일본어였다. 귀를 기울이고 한참을 들어보니 단순히 몇 마디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었다. 말의 속도도 자연스럽고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어휘도 제법 다양했다. 언뜻 들려오는 문장은 내가 못 알아듣는 일본어였지만, 어쨌든 그건 분명 ‘언어’였다.
잠시 후, 고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일본어 해?”
“음... 그런 것 같아요.”
고개를 갸웃하며 번역기를 열고 일상 문장을 일본어로 바꿔보라고 시켜보니 놀랍게도
“어디 사는 누구이며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초등학교를 다닙니다. 우리 가족은요…” 같은 자기소개와 일상대화를 일본어로 술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언제부터? 어떻게?”
고오의 대답은 간단했다.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계속 보다 보니까… 그냥 하게 됐어요.”
질릴 때까지 파고드는 아이의 기질. 책도 만화도 어릴때부터 반복해서 보는 아이었다.
게다가 우리 가족 자체가 애니메이션 마니아다. 지브리, 디즈니 가리지 않고 밥상머리 애니 시청은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넷플릭스 서비스로 시작된 일본 애니 시청으로 일본어가 자연스레 아이 안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또래의 누구보다 시간이 많은 아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가능했던 시간.
그렇게 일본에 가서 진짜 일본어로 현지인과 대화해보고 싶다는 고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부랴부랴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사교육비가 거의 나가지 않아 이런 갑작스러운 이벤트여행도 가능한 것 같다.
출발 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도착하자 고오의 활약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엄마를 대신해 길을 묻고, 식당에서 주문하고, 가게 점원과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아이.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일본 공항 출국심사대였다. 까치발을 들고 서서 수속담당자와 혼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고, 뭔가를 적고, 미소 지으며 심사대를 통과하는 고오의 뒷모습을 보며 울컥했다.
그 여행을 계기로 고오는 '애니관련 일본 유학'이라는 꿈을 품게 되었고 지금은 일본어 교재를 펴놓고 히라가나를 익히고 있다. 아이의 꿈을 지켜보는 것, 그걸 함께 만들어주는 일. 부모로서 그보다 더 뿌듯한 순간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