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내가 지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고, 남들이 그 글을 읽는다는 순수한 쾌감을 얻으며 한자 한자 자판을 눌러나가는 일을 꽤나 즐긴 흔적이 브런치에 남아있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씁쓸하다.
파란 하늘을 보고 여유를 논하고, 플라톤에서부터 여성성까지 꽤나 많은 의견을 논하던 10대는 수능이라는 길목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봤다. 남들보다 적어도 한발짝 늦춰진다는 두려움, 다시 도전하지만 성공할 지는 의문인 재수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은 사치로 변해버렸기에 나는 브런치 활동을 중단했었다.
꽤나 막막했던 일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행히도 원했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학은 기쁨을 맛본 새내기 재수생에게 꽤나 가혹한 곳이었다. 고등학교, 재수학원에서 약속하던 희망차고 달콤한 여유는 없었고, 새로운 경쟁이 날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이 내게 가져다 준 건 새로운 열의가 아닌 무력감이었다. 경쟁에서 노력해서 성공한 대가가 새로운 경쟁의 무대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친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나의 12년의 경쟁은 경쟁을 위한 선결과제였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던 최악의 결론을 넘어섰다. 결국, 난 상담실에서 상담을 받고, 아둥바둥 발버둥을 치며 지루한 수업을 듣고 집에 와 소모적인 sns의 노예가 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살다보니, 문득 삶이란 것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을, 그중에서도 역류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류에서 태어나 상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곳에만 도달하면 좋은 삶이 나를 반겨 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착각에 빠진 치어는, 그것만이 정답인 줄 안 채 상류로 향한다. 살점이 뜯기고, 뼈가 물에 시린 고통을 겪으면서도 옆에 있는 다른 치어들이 올라가기에 나 역시도 강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상류를 바라보는 것 조차 힘이 들 때, 치어는 하류를 바라보고 그곳에서 뒹구는 물고기들을 보며 저들보다 낫다는 우월감과 저렇게는 되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세뇌한다. 그렇듯 힘들게 올라간 고지에는, 더더욱 높은 물을 향해 올라가려는 물고기들이 나를 기다린다. 경쟁, 또 경쟁인 것이다.
이렇듯 올라가면서 느끼는 사실은, 현상 유지를 위해서도 심각하게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있는다면, 내려오는 물에 휩쓸리게 된다. 억지로라도 웃고 발버둥쳐야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은 내가 노력했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성과가 없을 때 느끼는 피로는 대단할 것이다. 하루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문득 떠오르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자신을 보는 것은 비참하다.
오랜만에 돌아와 내가 옛날에 쓴 글을 보니, 옛날의 내가 대단해 보인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이 된 나는, 실은 피로에 찌들어 휩슬려가는 피라미였을 뿐이다. 환상에서 벗어난 피라미는, 말라 비틀어져 부리꺾인 늙은 새의 먹이나 될 뿐이다. 우울하다는 감정을 바라게 되는, 비참한 피라미의 하루가 스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