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_ 차라리 회식에 가고 싶다.

아빠, 말 좀 해봐.

by 도링기

“엄마, 아빠, 이 쪽이 내 남자 친구야. 오빠, 우리 부모님. 서로 인사~!”

부모님과 남자 친구는 말 그대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국민 MC 유재석 님이 등판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매끄러운 진행이 어려울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부모님의 얼굴과 이제 갓 생산된 로봇같이 뚝딱거리는 남자 친구 사이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번뜩 오빠가 준비한 선물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 오빠가 이거 준비해왔다네. 어서 받아봐요.”

“어머, 뭘 이런 걸 준비해왔어요. 고마워요.”

KBS 주말드라마의 국민엄마 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엄마는 선물을 받았다. 오빠는 궁중비법이 담겼다는 정과 세트와 화사한 꽃다발을 건네었다. 꽃을 본 엄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웬만한 어머니들은 다 꽃을 좋아하시지. 정말 예쁘다며 화사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와 남자 친구의 얼굴도 한층 밝아졌다. 고맙다, 꽃들아. 너희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

꽃다발을 첫인사 필수템으로 지정합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소고기 집이었다. 미리 예약해둔 방에 들어가니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날씨까지 받쳐줘서 정말 경치가 좋았다. 멋진 풍경 덕분인지 우리의 분위기도 좀 더 유해졌다. 엄마는 아무도 묻지 않은 식당의 히스토리를 읊어주었고 오빠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으며 난 어서 주문을 해버렸다. 그리고 아빠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도 말 수가 많지 않은 아빠지만, 낯을 가리는 건지 마치 주변을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말을 아꼈다. 사회성이 좋은 엄마에게 감사했다. 엄마는 말을 놓지 않았지만, 오디오가 비지 않도록 적절한 질문과 적절한 토크를 이어나갔다. 이미 나를 통해서 기본 정보를 접했지만, 부모님은 직접 대화를 통해서 정보를 다시 수집했다. 이것이 바로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라는 것일까.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고기를 구워주는 담당 서버 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친정에 놀러 왔나 봐요."
"아니요, 여기는 제 남자 친구고 오늘 부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예요."
"어머~! 난 또 신혼부부인 줄 알았잖아요. 정말 잘 어울리네."


극한의 E형이었던 걸까, 서버 분은 방금 전에는 신혼부부와 처가댁이 밥을 먹고 갔다며 오늘 이 룸에 오시는 분들이 다 비슷한 것 같다고 스몰 토크를 시전 했다. 나아가 오늘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으니 사진을 찍어주시겠다며 제안하셨다. 우리는 홀린 듯 사진을 찍었고 누가 보면 마치 가족사진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셨다. 실로 엄청난 인싸력이었다.

만난 지 한 시간만에 도출한 결과물.


고기를 먹으며 가만히 우리 넷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진 속 아빠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만에 차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버분이 자리를 비우자, 아빠가 드디어 말 한마디를 꺼냈다.

"저분은 너무 말씀이 많으시다."

… 실제로 불만에 차있었다. 간신히 보드라워진 분위기가 다시 경직되었다. 차라리 회식이 그리울 정도였다.

그러나 맛있는 소고기는 사람을 녹이는 법이다. 나와 엄마의 필살 토크력으로 우리의 거리는 차츰 가까워졌다. 한참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빠는 말을 편하게 하겠다고 선포하고 바로 말을 놓으셨다. 이름과 형제자매 관계, 고향 등을 물어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경치 좋은 카페로 자리를 이동했다. 부모님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동안 오빠와 둘이서 주문을 하고 커피를 기다렸다.

"오빠, 힘들지. 고생하고 있어."
"아니야, 고생은 무슨. 고기 맛있더라."

비록 로봇 같은 웃음이지만 끝까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친구가 대견했다. 분명 어려운 자리일 텐데. 안타까운 마음과 고마움이 동시에 들었다. 더불어 나 역시 비슷한 과정을 한 차례 겪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네 명이 옹기종기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아빠에게 질문을 건넸다.

"아빠, 아빠는 외할머니한테 처음 인사드리러 갈 때 어땠어?"

내가 생각해도 기발한 질문이었다. 아빠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답을 했다.

"그냥 뭐, 엄청 긴장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잘하겠다, 예쁘게 봐달라 그랬지."
"아빠도 그럼 오빠 심경을 알겠네. 오빠도 잘 봐줘, 아빠."
"아이고 내가 뭐 그렇게 못 봐줬다고."
"아까부터 말도 없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잖아~"

딸내미의 투정을 듣더니 아빠는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내가 원래 말이 없어. 애엄마는 이렇게 말주변이 있는데 나는 그런 재주도 없고, 좀 낯설고. 그래서 오늘은 조용하니까 ㅇㅇ군이 이해 좀 해줘요."

"아니에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밥도 잘 먹고 바다도 정말 예쁜걸요."

나의 촌철살인 같은 질문으로 분위기는 한결 유해졌다. 내가 우리 집의 유재석이요, 송은이다. 아빠는 본인의 과거가 떠올랐는지 눈가가 좀 더 촉촉해졌고 괜히 엄마에게 미소를 날렸다. 엄마가 그 미소를 그다지 받아주지 않는 장면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우리가 헤어질 순간이 되었다. 남자 친구는 바로 올라가면 피곤하니 호텔을 미리 예약해두었다.


"아휴, 혼자서 여기 잔다고 생각하니까 영 마음이 그러네요."


엄마는 마지막까지 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의 거리감이었을까.


"괜찮습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그래, 푹 쉬고 또 한 번 봐!"


아빠는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나누었다. 확실히 처음보다는 더 가까워진 게 느껴졌다. 아빠와 남자 친구의 맞잡은 손에서 조금 더 정이 싹트기를, 그래서 우리의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붙잡고 그의 첫인상을 물어보았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낫다, 착해 보인다, 크게 속 썩이지 않겠다는 긍정적인 의견과 한 번 봐서 어떻게 아냐, 은근히 고집이 있을 것 같다 는 애매한 의견이 공존했다. 그 와중에 다 맞는 말이어서 이것이 바로 어른들의 사람 보는 눈인가 싶었다.


냉철하게 분석하는 듯했지만, 부모님은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남자 친구가 혼자서 저녁은 챙겨 먹는지, 심심하지는 않은지 계속 신경 쓰더니 다음날 아침 메뉴까지 추천해주셨다. 그 근처에 맛있는 복국 집이 있으니 그거 먹으라고.


"아빠, 오빠가 애야? 알아서 김밥천국 가겠지, 뭐."

"아니 여기 지리도 모를 텐데 그 정도는 알려줘야지."


이렇게 뒤에서 챙겨줄 거면 아까 말이나 좀 하지. 아빠는 오빠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하루 자고 가는 거였으면 우리 집 근처 호텔로 잡아줄 걸 그랬다, 저녁은 어떻게 한다고 하냐, 온 김에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일 너랑 ㅇㅇ이는 뭐 할 거냐, 라며 그동안 못한 말을 하듯 질문과 의견을 쏟아내었다. MBTI에서 내가 극강의 E형이라면 아빠는 I가 틀림없었다.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빠가 준비한 선물을 꺼내어보고 꽃다발은 거실 한쪽에 잘 배치해두었다. 정말 꽃이 예쁘다며 환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나 또한 흐뭇해졌다. 이래서 대리 효도가 하고 싶은 걸까? 오빠 덕에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니까 괜스레 내 기분도 좋아졌다.


이렇게 얼렁뚱땅 첫인사가 마무리되었다. 홀가분한 마음과 오빠네 댁에 인사드리러 가야 한다는 또 다른 숙제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 결혼 너무 어렵다.


한동안 거실을 차지한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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