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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 do rough Dec 07. 2020

「30살 앞 30날」D-26

5. 26

30살 앞 30날



5. 26, 5달 26날



5번째 글의 주제는 26. 문득, 올해 5번째 26일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벌써 6개월도 더 지난 그 날의 기억은 이미 내 머릿속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 날은 엄마의 생일이 4일 지난 후였다는 것, 그리고 그 시기에 내가 아주 좁고 깊은 터널에 빠져 몸도 마음도 괴로운 상태였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되면서 이제 내 말과 행동의 대부분은 데이터로 변환되어 클라우드 서버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데이터를 기억으로 되돌리기 위해 핸드폰의 갤러리와 캘린더, 메모장을 뒤지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피드와 스토리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파편들을 모아보니 그 날의 기억을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기억 1. 

인스타그램에 새벽 1시 3분에 올린 스토리가 있었다.



같은 시각, 찍었던 사진 한 장

스토리에는 연속된 2개의 영상이 있었고, 그 영상은 새벽의 장막이 낮게 깔린 한강을 비추다가, 점차 시선을 돌려 한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나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15초 남짓한 영상에서는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이따위니 인생이, 그지. 그래서 뭐 난 행복해.

난 아무것도 아냐 원래. 의미 없이 숨 쉴 뿐이야.

<혼자 추는 춤>, 언니네 이발관.



영상을 보며 어느 정도 돌아온 기억에 의하면, 또다시 찾아온 우울감과 자괴감을 어떻게든 털어내 보려고, 나는 그 새벽에 굳이 한강으로 향했다.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물을 좋아한다. 굳이 물에 빠지지 않더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로. 다만, 올해 들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해가 진 후에 바라보는 물은 기분 전환에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심연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몸이 빨려 들어가고, 물살에 내 정신이 휘말리는 듯해서 두려웠다.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마시며 기분 좋게 바라보는 것은 괜찮지만.



그래서 그 스토리를 올린 다음에는? 아쉽게도 정말 아무런 기억이 없다. 

굳이 5월의 서늘한 새벽 공기를 견뎌가며, 1시간은 더 그 자리에 앉아 한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들이 그 물살에 자연스레 씻겨내리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기억 2.

갤러리에 오전 10시 20분에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작고 좁은 원룸에 놓인 작고 좁은 작업대 위에 작고 좁은 인센스 홀더. 향을 피우는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아마 몇 시간 전까지 한강에서 홀로 그 난리를 피웠던 것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향은 흐트러진 내 정신을 차분히 가라앉게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다. 

향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라, 캔들이나 디퓨저가 한참 유행할 때에도 나는 유독 향을 고집했다. 특히, 절에서 우러나는 것 같은 나무 향을 아주 좋아하는데,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의 유명한 절이라면 어디든 다 데리고 다닌 엄마의 정성을 잊지 못한 탓이 아닐까. 종교적인 의미는 없다. 한국사를 가르치던 엄마의 가정교육의 일환이었을 뿐이고, 심지어 엄마는 천주교 교인이니까.



향을 피우는 행위가 가진 힘이 있다. 

향에 불을 붙이고, 손으로 향을 휘저어 그 불을 끈 후에, 조심스럽게 그 향을 홀더에 꽂기까지. 어느 한순간도 경거망동할 수는 없다. 향이 부지불식 간에 사그라진 후에도, 그 향은 날아갈지언정 향을 피운 흔적은 재로 남아 다시금 나를 진정시킨다. 



그래서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나도 모르게 향을 피우고는 한다.





기억 3.

메모장에 오후 10시 48분에 완성한 토막글이 하나 있었다.



사자 한 마리가 초원에 누워있다.

아주 여유롭고 한가한 표정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으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듯.


아니, 그건 사실 거짓말이야.


사자 한 마리가 초원에 웅크리고 있다.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발톱을 숨긴 채.

먹잇감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쫓으며.

언제든 뛰어오를 기세로.


아니, 그것도 사실 거짓말이야.


사자 한 마리가 초원에 숨어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한 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아야 할 텐데.

혹시라도 하이에나들이 지나가다 나를 보면 어떡하지.

물소들도, 얼룩말들도, 기린들도, 아니 심지어 미어캣들도.

아무도 나를 찾지 말아야 할 텐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애써 걱정하며.

몰래 숨어 지낼 구덩이를 파내면서.


아니, 그것까지도 거짓말이야 사실.


나는 사자니까.

나는 거짓말쟁이니까.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아프리카 대초원을 위엄 있게 걷는 사자 무리의 늠름한 모습은 왠지 모르게 강렬하게 기억 한 켠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과 그 경쟁에서 도태된 수사자의 비참한 미래가 있다. 

우두머리 경쟁에서 패배한 수사자는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생활하게 되는데, 백수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아주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함께 싸워줄 동료가 없기 때문에, 하이에나 무리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어쩌면, 그런 수사자라면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이지 않을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든 상태이지 않을까.



나는, 사자니까. 

몰래 숨어 지낼 구덩이를 파내는 나는, 사자니까.



나는, 거짓말쟁이니까.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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