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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 do rough Dec 11. 2020

「30살 앞 30날」D-23

8. 23

30살 앞 30날



8. 23, 앞으로 나아갈 길.



진로(進路). 앞으로 나아갈 길. 

장래와도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대략 17-18살 이전에는 장래 희망을 묻고, 그 이후에는 진로 계획을 묻는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직전에, 291문항의 진로 검사를 마쳤다. 정확히는 STRONG INTEREST INVENTORY(직업흥미검사)라는 것으로, 미국의 직업 심리학자 에드워드 스트롱 선생님에 의해 개발된, 개인의 직업흥미를 분석하여 진로 계획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검사라고 한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검사를, 30살을 23일 앞둔 내가 받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23번째 삶의 내가 이 검사를 받았더라면, 조금은 덜 굽이진 길을 걸어왔을까.



23번째 삶의 시작은 말년 휴가였다. 3월 초 전역을 앞두고 그동안 쌓아놓은 휴가를 탈탈 털어 꽤 긴 기간을 군대 밖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을 온전한 휴가로 보낼 수는 없었다. 3월에 칼같이 복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 새로운 자취방을 구하고, 복학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챙기고, 수강신청을 준비해야 했다. 동시에, 고시 공부의 시작을 알리는 1차 시험을 응시하기 위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치르고, 시험을 틈틈이 준비했다.



제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은 전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패기나 포부 따위는 없었다. 나의 진로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신호등이나 건널목 따위도 없는 1차선 일방통행으로.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껏 술이나 마시고 노래방과 PC방을 전전하는, 군대에서 박탈당한 자유를 잠시 누리는 것뿐이었다.



U턴을 하고 싶어도, 내가 탄 차의 운전대는 부모님이 꼭 붙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지만, 군대를 가기 전부터 모종의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되어 있었다. ‘군 제대와 동시에 고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라는. 부모님은 어째선지 내가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아들의 고시 합격을 기정사실로 치부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반항은 고시 낭인들이 모이는 신림동으로 떠나지 않는 것 정도였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듯 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아, 참고로 진로 이전에 장래 희망에는 무엇이 있었냐 하면, 아주 어릴 적에는 버스 운전사, 그 이후에는 체육 선생님이었다. 모두 내 기억에는 전혀 없던 이야기로, 엄마의 기억에서 가까스로 복원된 것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첫 장래 희망은 고등학교 3학년에 구체화된 것으로, 지리 과목 선생님이었다. 1년 만에 제거되었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놀랍게도, 뚜렷한 진로 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



벌써 세 번째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나를 아직 잘 모르고, 그런 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23번째 삶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30번째 삶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야 알게 된 사실.



달리던 차 문을 억지로 열고, 허허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내려 이리저리 길을 찾다, 시간도 방향도 모두 알 수 없어 멍하니 제자리에 멈춰 서버린 나의 삶.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은, 저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해가 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내뱉는 한숨.



진로 검사를 모두 마친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류의 검사들이 항상 그렇듯, 문제 하나하나에 깊게 고민하지 말고, 떠오르는 그대로 빠르게 입장을 정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검사를 하는 내내, 대부분의 항목에서 나는 1점도 5점도 아닌 3점(모르겠다)에 체크한 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스트롱 선생님,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내리실 수 있으십니까.



「30살 앞 30날」은 30살, 그리고 그 이후를 바라보는 진로의 가운데에 놓인 이야기이다. 

30날의 첫 일주일을 완주한 나에게 묻고 싶다. 과연 30날을 모두 완주했을 때, 그 앞에 놓인 진로는 어떤 모양으로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장래에는 희망이 있을까.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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