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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 do rough Dec 15. 2020

「30살 앞 30날」D-18

13. 18

30살 앞 30날



13. 18, 선택능력시험



우리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굳이 큰일이 아니더라도, 매 끼니마다 어떤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할지, 커피는 뜨거운 게 나을지 차가운 게 나을지, 오늘은 맥주를 한 캔 마실지 아니면 그냥 참고 잠을 청할지.



선택은 곧 자유이다. 나에게 선택지가 주어지고, 그중에 하나를 고를 자유가 있을 때 비로소 선택이 가능해진다. 선택 장애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는 뱉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거의 없는 단어였으니까. 나 또한 매일 겪고 있는 선택 장애는, 그만큼 우리에게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자유가 넘쳐흐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처음으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본다. 태어나는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고, 내 이름 또한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일상의 사소한 선택이 아니라, 내 인생에 있어 꽤 중요한 분기점이 될 만한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를 그렇게도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던 선택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순간을 떠올리고 있을까.



18번째 삶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니, 태어나 처음으로 수험생의 삶을 살았던 때이다.


 

수능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앞둔 그 1년 동안 치른 시험이 몇 번이었던가. 3월, 6월, 9월 총 3번의 전국 모의고사와, 매 학기 내신 성적을 위한 중간-기말고사가 도합 4번,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수 차례의 각종 학원 모의고사들에, 그 모든 노력을 평가받는 마지막 단 한 번의 수능 시험까지. 

살면서 그때만큼 OMR 카드를 많이 써 본적은 단연코 없다. 그 1년 동안 쓴 컴퓨터용 사인펜이 18개는 될 것 같다. 대부분은 잃어버렸을 테지만.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1분 전, ‘종 치면 OMR 카드 바로 걷는다’ 는 감독관 선생님의 일관된 멘트는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시험지와 카드를 몇 번이고 번갈아가며 확인을 해도, 혹여나 잘못 마킹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문제 풀이가 길어지는 탓에 1분 전까지도 마킹을 다 못한 경우에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서너 방울 흘러내릴 정도였다. 시험 종료를 앞두고 마킹 실수를 발견하여 답안지를 바꾸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어휴.



차라리 끔찍이도 싫어하는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불안한 시선, 떨리는 손가락, 터질듯한 심장 박동까지 모든 감각이 평소보다 100배는 증폭되는 그 순간.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습관은, 마지막까지 답을 고민하며 마킹을 미루던 문제를 꼭 종이 울리는 순간 마지막으로 마킹을 하는 것이었다. 으르렁대는 종소리에 놀라 몸을 흠칫 떨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꾹 눌러 찍는 마침표.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한 번도 마킹 실수로 억울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수능 당일에도 그 긴장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고 집중력도 좋았지만, 긴장을 지나치게 많이 한 탓인지 체력이 빠르게 고갈되었다. 진이 빠졌다고 해야 할까. 평소에도 수십 일 동안 수능 시간표에 맞춰 생활하며 스케줄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3교시라는 꽤 이른 타이밍에 남은 체력이 방전되고 말았다. 사회탐구영역과 제2외국어까지 남은 시험이 5개였지만, 곧장 머리는 점점 쪼개질 듯 아파오고 눈이 뻐근해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결국 매 교시마다 마지막 5분은 눈을 감고 엎드려야만 했다. 분명 고민되는, 아쉬운 문제들도 있었겠지만 나를 믿기로 하고 빠르게 마침표를 찍어나갔다. 그래도 시험은 끝까지 봐야 했으니까.



그 이후로도 OMR 카드에 마킹을 해야 하는 순간은 여럿 있었다. 영어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여러 시험들이나, 채용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각종 검사들. 하지만 그때만큼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감 속에 마킹을 한 적은 없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참 어렸었기 때문일까.



지금 내 모습에서 반추해보건대, 아마도 마킹을 하는 행위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게 아닐까 싶다. 선택의 순간, 정답이냐 아니냐를 의심하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그 정답을 실수 없이 정확하게 입력해야 한다는 그 마음. 마킹을 잘못해서 아는 것도 틀리게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이 아니었을까.



막상 그 수십 장의 OMR 카드보다 훨씬 중요한, 내 향후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대학 진학이라는 선택에 대해서는 별다른 집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꽤나 어이가 없는 대목이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탓도 있겠지만, 지금도 꽤 후회가 남는 선택의 순간 중 하나이다.



18번째 삶의 나를 되돌아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어린 나이였지만, 본질보다는 형식에 얽매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지식의 깊이보다는 마킹의 정확도에, 삶의 방향보다는 대학의 이름값에 얽매여 정작 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놓쳐버린 삶.



나는 과연 그 18번째 삶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었을까. 

아직도 여전히 답안지를 바꿀 일이 없도록 깔끔하고 번듯하게 마킹하려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어리고 어리석은 18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과연 답을 알고 있을까.


답안지 좀 바꾸면 뭐 어때서.



이런, 18.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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