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 do rough Dec 04. 2020

「30살 앞 30날」D-29

2. 29

30살 앞 30날



2. 29, 29번째 삶.



29번째 삶도 29일 뒤면, 끝이 난다.



내 삶은, 특히 20대 이후로, 거의 1년을 주기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멋모르던 대학교 신입생 시절을 지나, 1년 동안 밴드에 모든 시간을 바치기도 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잠깐 복학생의 생활도 했다가, 고시생의 삶을 살기도 했다.



고시생의 삶이 그나마 오래 지속된 탓일까,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변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마지막 고시를 치르던 날,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려갔고, 고생한 아들 내미를 위해 차려진 저녁상 앞에서 나는, 폭탄을 뱉었다. 이제 고시 공부를 하지 않겠노라고. 한 여름이었지만 분명 그 식탁의 공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쩌려고 그러냐는 부모님의 말에,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고 답했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눈빛의 압박 속에서 나는 무심결에 패션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탓에 내 삶의 변화 속도는 빨라져야만 했다.



미래의 경쟁자들에 비해 적어도 5년은 뒤쳐져 있다는 불안감은 되려 아주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그때부터 취업 전까지 3년 동안은 여느 때보다 열심이었다.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놀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했다. 1년도 길게 느껴질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삶의 목적과 내 역할이 달라지는 그런 삶.



그런 삶은 취업을 하고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년 3개월 동안 직장인으로서 살면서 2개의 회사에서 4개의 소속을 가지고 일했다. 그런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6개월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자평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28번째 삶까지는 그런 다이내믹을 즐겼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마음은 조급해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해야만 그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만약 나에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면, 28번째 삶이 끝나는 날에는 온 손톱이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29번째 삶의 초반까지도 그 흐름은 이어진 듯하다. 관성의 법칙이랄까. 그런데,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징검다리를 요리조리 홀짝이며 뛰어다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그 다리 밑에는 생각보다 깊은 낭떠러지가 파여 있었고, 이리저리 구르고 바닥에 처박히며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대학생 때 떠오르는 그런 기억이 있다. 발에 크게 화상을 입어서, 발이 땅에 닿기만 해도 지끈거려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소위 썸을 타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픈 발을 이끌고,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정해진 약속들을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말은? 발은 퉁퉁 부어서 극한의 고통을 나에게 선사했고, 그 발을 본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화를 냈고, 썸은 썸으로 끝나버렸다. 그러니까, 이 미련한 것아. 아플 때는 참지 말고 쉬었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진 못한 것 같았다.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릴 여유는 없다는 생각에, 또다시 징검다리 위로 애써 기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며 더욱 상처는 깊어져만 갔다. 이것이 29번째 내 삶의 초반에 일어난 일이다.



29번째 삶이 거의 끝나가는, 30번째 삶을 30일쯤 앞둔 이 시점에 다다라서야 나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상처가 아물고 피로를 회복하고 아픔을 잊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방해받지 않도록 지켜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나를 돌봐줄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님이나 친구가 아닌 나,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를 내가 외면하는 순간,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질 뿐이라는 것을.



지난 글에 쓴 것처럼, 나는 아직 내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미사여구가 필요하다. 설령 나를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까지는 가능할지라도, 1인칭의 관점에서 내가 '나'로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느낀다.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에만 온 신경을 쓰다 보니, 그 속이 텅 비어버린 것을 이제야 알아버린 것 같다.



29번째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내 삶을 되돌아보며, 내 상처들을 보살피고, 내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며, 내가 꿈꾸는 미래를 궁금해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흉내라도 낼 수 있도록.



결국에는 내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30살 앞 30날」D-3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