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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Nov 04. 2022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47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다.




이사를 하게 되면 한동안은 새로운 소음으로 인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지면 그 어떤 소음도 어느새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나면 한밤중에 들려오는 복도의 발소리, 승강기 소음,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샤워기 물소리 등 웬만한 소리에는 잠이 깨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소리 특히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는 유독 예민했다. 주방 싱크대 수도꼭지 속에 고여있던 물이 저녁 내내 모이고 모이다가 새벽에 한 방울이 '똑'하고 떨어지는 그런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곤 했다.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했던 게 아니라 작은 소리에만 예민했던 건지도 모른다.

평소 승강기에서 내리면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승강기에 타고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승강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를 때면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시작되었다. 그 느낌이 너무도 불편해서 한동안은 계단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계단에 개인 CCTV가 설치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포기했다.

가장 심한 곳이 은행 ATM 앞이었다. 지금도 그곳에만 가면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처음에는 컨디션 때문인 걸로 알았는데 그곳에만 가면 항상 힘들었고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에 서둘러 나와야 했다. 다른 문제는 없었으니 전자파나 기기들의 소음으로 인한 진동 때문이려니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나는 소리가 아니라 진동에 예민한 건지도 모른다. 물이 떨어질 때의 소리가 아니라 물이 떨어질 때의 진동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매트리스 위에 있을 때 더욱 심하게 느꼈는데 이상한 진동을 느끼게 되면 어디선가 꼭 지진이 발생했다.

처음 매트리스 진동을 느꼈을 때가 2007년 1월 20일 서초동 오피스텔 4층에 거주할 때였다.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매트리스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엔 그 떨림이 너무도 심해서 싱글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매트리스 모서리 부분을 움켜쥐었던 기억이 난다. 지진이 난 걸까? 아님 건물에 문제가 생긴 걸까? 하며 공포에 휩싸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길게 느껴졌던 그 진동이 멈추자 옷을 챙겨 입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해 보였다. 1층에만 살다가 난생처음 4층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고층이라 그런가 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웃어 넘기기엔 여파가 너무나 커서 지진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서울에 있던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건물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날 지진이 있었다.

'2007년 1월 20일 20시 56분, 오대산 남쪽에서 리히터 규모 4.8 지진이 발생했다.'

1978년 대한민국 지진 관측이 시작된 후, 한국에서 일어난 지진 가운데 최대 규모의 지진이었던 2016년 9월 12일 경주 지진 때는 매트리스 위가 아니었지만 흔들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2016년 9월 12일 19시 44분/20시 32분, 경상북도 경주시 남서쪽 8~9km에서 리히터 규모 5.8/4.5 지진이 발생했다.'

목동에서도 매트리스 진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 너무나 크고 오래 지속되어 처음에는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부르르 하고 떠는 상황을 증거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휴대전화를 으려고 했으나 매트리스가 공중 부양을 한 듯 한참을 들썩여서 순간적인 공포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정말 건물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는데 그때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2017년 11월 15일 14시 29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북쪽 9km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5.4 지진이 발생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건물에 어떤 묵직한 울림이 들리는 듯해서 잠이 깼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사방은 조용했으나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는데 잠시 후,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나직한 말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그 순간 같은 층에 살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생각났다. 한 할머니의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되자 옆집에 살던 할머니와 평소에도 '형님, 아우' 하면서 서로를 챙기셨다. 그런데 3호, 4호 할머니들이라고 하기엔 말소리가 너무 작았다. 평소에 할머니들은 복도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대화를 하셨기 때문이다. 인터폰 카메라 방향에 문제가 있어서 옆집만 보일뿐, 복도 반대편은 보이지 않았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새벽에 인기척이 들리는 상황에서 현관문을 연다는 것은,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옷 바람에 현관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았다.

맞은편 집 현관문이 열려있었고 구급대원들이 모여있었다. 4호 할머니가 편찮으신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집에 없던 아들이 전날 저녁에는 집에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할머니 혼자였던 모양이다. 스스로 119에 연락해서 구급대원들이 출동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구급대원에게 물어봤자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답은 기껏해야 할머니가 아프다는 말이 전부일 듯 싶어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할머니가 이송되는 기척이 들렸는데 내가 들었던 소리는 이동침대의 바퀴 소리였던 모양이다. 새벽이라 그런지 사이렌 소리는 없었고 무슨 특수 작전을 방불케 하듯 그렇게 구급대원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건물 내 그 누구도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새벽의 일이 떠올랐다. 119를 부르면 사이렌을 켜고 요란하게 출동해서 무작정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이송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날의 풍경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구급대원들은 소리 소문 없이 건물로 조용히 들어왔고 환자가 의식이 있으니 충분한 대화를 통해 병원 이송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코로나 시국에 고열로 사경을 헤맬 때 119를 부를 걸 그랬다 싶었다. 같은 관할이니 그들이 왔을 테고 어쩌면 나도 그들의 특별한 케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곁에서 상황을 체크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면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들로 인해 병원에 갈 용기도 생겼을 것 같았고 그들에게 받은 위로 덕분에 병원비가 아깝지 않았을 것 같았다.

평소에 정정하셨던 할머니였다. 이사 오고 한두 번 마주치고 몇 년 만에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나를 보시더니 대뜸 "이제는 산 사람 얼굴" 같아 보인다며 반겨 주셨다. 처음 봤을 때는 '젊은 사람의 몰골이 곧 죽을 사람'처럼 아파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주변의 건강을 걱정하던 분이셨는데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침 그날은 신부님과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그 상태로 가서 눈칫밥을 먹기는 싫었으니 모임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연락이 왔다. R이 그날 모임에 오지 않는다고 했단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참 소식을 듣고 이제 와서 가겠다고 하는 것도 다소 웃기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이유로 그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새벽의 그 일이 생각났다. 은퇴하신 신부님은 멀리 원주에서 생활하시면서 가끔 서울에 오시는 거였다. 이번에는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다음 기회에 만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불안해졌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조급해졌다.

"가도 될까?"

마리아는 레스토랑 예약을 맡은 S 자매에게 연락해 보라고 했다. 그 순간, 빈말이어도 오라고 반기는 말이 그리웠으니 첫째 S에게 연락했다. 가도 되겠냐고 하니 흔쾌히 오라고 반겼다. 그래서 기분 좋게 가기로 했다.

광화문까지는 한 번에 가는 버스 편이 있었고 나에게 광화문은 편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6년 전의 그 사건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은퇴 미사 때 신부님을 뵙기는 했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인지 그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20년 전의 나를 기억이나 할까 싶었지만 이날은 달랐다. 레스토랑에 들어오시던 신부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먼저 아는 체하셨고 기꺼이 반겨주셨다.

신부님을 이어 K 언니가 들어왔고 이내 마리아도 도착했다. S자매 중 둘째는 개인적인 일로 오지 못했고 레스토랑을 예약한 첫째 S가 홀로 도착했다. 단체 대화방에는 없었지만 그 시절 함께 활동했던 S 언니도 뒤늦게 합류했다. 식품 영양과 교수가 된 언니는 방송에도 종종 출연하곤 했다. 톡으로는 동생인 나에게 존대를 하던 S 언니가 그날은 옛날처럼 편하게 대했다. 학생들 중에 간혹 교수의 반말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습관이 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처음 가 본 온 더 보더, 메뉴 고르기가 쉽지 않아 그곳선택한 S가 주문을 도맡았다. 그러나 거기 모인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고수를 먹지 못했는데 그날 주문한 대부분의 음식에 고수가 들어있었다. 오랜만의 외식에 신난 나조차 나초로만 배를 채웠고 신부님도 제대로 드시지 못해서 그날의 메뉴 선택은 실패였다.

하지만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 어떤 불안도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이 튀어나오면 그들과의 추억이 되살아나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이들의 연락처를 묻고 다녔는데 그중 우리와는 연락이 끊겼던 Y 언니의 연락처를 신부님이 알고 계셨다. 너무 오랜만의 통화라 그런지 Y 언니가 나에게 존댓말을 다. 경찰이었던 이 언니도 직업상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지만 멈추었던 시간만큼 그 존대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조만간 만나기로 했다. 이날의 긍정 에너지가 나를 또 얼마 동안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니 가급적 빨리 만나고 싶었다. 언니의 근무지가 파주라 평일은 힘들었고 집이 서울이라 주말에는 가능하다고 했다.

과거 속 인연들과 오랜만에 만나면 옛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람보다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쩌면 나는 또다시 R에게 먼저 연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부님은 이 모임 때문에 기꺼이 서울 나들이를 하신 거란다. 아직도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았지만 이미 돌아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두신 터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우셨는지 카페에 가자고 하셨다. 그러나 자리가 없어서 테이크아웃을 했고 서울역 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새 단장을 마친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서 헤어졌다.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을 텐데, 이날 얻은 긍정의 에너지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한 번쯤은 정리하고 싶었던 나의 과거였다. 누군가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을 때,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마음이 홀가분했고 실제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그들의 사정이란 것도 있을 텐데 너무 내 입장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들었다. 거듭되면 될수록 내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또한 나에게 불편하게 다가왔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지금 그만두면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버티는 중이었다.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50회에서 멈추기로 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온라인 삶보다 오프라인 삶을 살고 있었으니 대한민국 통신망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카오톡 쓰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브런치가 실행되지 않았다. 어떤 공지도 없었으니 내 폰이나 인터넷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플을 삭제하고 다시 설치도 해봤지만 그럼에도 여전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제야 SK 판교 데이터 센터 화재로 인한 카카오 사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틀째 새벽이 되자 브런치가 실행되었고 나의 글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브런치에서 살아왔던 시간이 멈추게 되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통신망 사태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글쓰기를 멈추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수시로 확인은 했지만 생계와 관련되지 않은 브런치 복구는 가장 뒷 순서가 되겠다 싶어 애써 마음을 비웠다. 언젠가는 복구가 되겠지만 기다리는 그 하루하루가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그래도 다음 글을 발행하기까지 열흘이란 시간이 있었으니 그전에는 복구되겠지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매거진을 발행하는 날, 다행스럽게도 정상화되었다는 공지가 떴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내 브런치는 여전히 15일 오전에 멈추어 있었다. 읽기, 수정은 가능했지만 저장, 발행은 되지 않았다. SK 판교 데이터 센터에 화재가 나던 날, 이미 글을 거의 마친 상태라 그대로 발행만 하면 되는 거였다. 수십 번, 수백 번을 시도하면서 제 날짜에 발행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정이 되고 날짜가 바뀌고 나서야 가까스로 포기할 수 있었다.

내가 카카오톡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심플했기 때문이었다. 용량이 크지 않아서 와이파이가 오락가락해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쓰게 되었으니 통신비 들이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카카오톡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권유했다.

무엇보다 이런 점을 본받으라고 회사에 건의하기도 했다. 간단하고 안정적이니 편리하다고 생각해서 누구나 쉽게 사용하게 되고, 그렇게 자주 사용하다 보면 점차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다른 것'을 사용하기 힘들어질 거라고. 쉽게 이탈하지 않을 '충성 고객'을 많이 두었을 때,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접목시키면서 이익을 창출하면 기업도 성장하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그때 가서 번거롭다고 생각하게 되더라도 나 같은 사람은 이미 충성 고객이 되어 있을 테니 쉽게 이탈하지도 못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회사는 이미 성장한 카카오처럼 되려고 했으니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다 시작부터 망했고 카카오는 성장했다.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접목시킨 카카오톡은 점점 거대해졌고 그만큼 불편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이제 와서 쉽게 버리지도 못했다.

결국 지난달 24일에는 매거진을 발행하지 못했다. 하루쯤 발행을 안 한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나름의 규칙이 어긋났다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저장이 되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하루만 빨리 복구되었더라면, 적어도 내 브런치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우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 동안 멈추어 있는 기분이었다. 글이라도 써야 버틸 수가 있었던 거였다. 하소연이면 어떻고 투정이면 어때? 쓸 수 있을 때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정한 규칙은 이미 어긋났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 세 번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는 스트레스받지 말고, 쓰고 싶을 때 쓰기로 했다. 브런치 오류가 만들어 준 새로운 규칙이라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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