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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Feb 1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7

힘들 때 느낀 감정은 평생 간다는데...

내 영혼을 살리고 싶었다.




한쪽으론 눈 덮인 한라산 능선이 보이고 한쪽으론 푸른 제주 바다 수평선이 보였다. 이것이 매일 아침 내가 바라보는 출근길의 풍경이다. 도심 한가운데라 정작 바다에서 2km 떨어진 곳이었지만 제주도의 지형상, 웬만한 곳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어서 그건 참 좋은 것 같았. 제주 땅을 밟은 지도 어느덧 보름째에 접어들었지만 아직은 실제로 바다에 가보지는 못했다. 눈앞에서 바다를 본 것은, 제주 공항에 착륙하면서 보았던 그 바다 풍경이 전부였다. 그래도 좋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힘들었던 과정은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주도 관광지관광객이나 가는 곳이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우선은 일에만 집중하자 싶었. 10년 만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더구나 지금은 고 싶었던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온몸에서 파스 냄새가 가시는 날이 없지만, 또한 해가 지기도 전에 끙끙대며 잠들고 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백수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다. 유일하게 하루 쉬는 일요일엔 아침으로 먹는 토스트가 그날의 유일한 식사였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성당에 다. 해외에 나가서만큼은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제주에서도 매주 주일미사에 가고 있다. 아직은...




지난 11월에 제주행이 예정되자 가장 먼저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고 12월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미 냉장실은 모두 비웠었다.

냉동실에는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참깨, 들깨, 들깨가루가 남아있었지만 2주간 먹을 쌀이 있었으니 여행에서 돌아와서 들깨 된장찌개를 만들어서 된장과 들깨가루를 소진하고, 팟타이 면으로 매콤 볶음면을 만들어서 참깨, 간장, 굴소스 등을 소진하고 고춧가루 일부도 소진할 계획이었다.

작년에 채소가격 폭등으로 열무김치나 얼갈이김치를 자주 만들어 먹지 못해서 고춧가루가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건 아깝지만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가서 김치를 담가 먹을 상황은 아니었고 일 년 전에 보내온 고춧가루라서 어머니도 이에 동의하셨다.

남아있는 재료를 모두 소진한 후에는, 제주로 떠나는 날까지 비상식량으로 먹으려고 베트남에서 인스턴트 포보 등을 사 왔다. 나에게 라면은 언제나 비상식량일 뿐인데 한국 라면은 양이 많고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제주에 가서 당장 먹을 비상식량도 필요했으니, 혹시라도 남으면 제주에 가지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1월 제주행이 무산되면서 다시 먹거리를 장만해야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집에서 매년 장을 담그신다. 자식들 먹일 낙으로 직접 장과 김치를 담그시지만 세 남매 중에서 (동생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나만 유일하게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대로 받아먹었다. 제주도에 가야 해서 이번에는 김장 김치를 보내지 말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주행이 무산되면서 아니, 무기한 연기되면서 조금만 보내달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또다시 한 박스를 가득 채워서 보내주셨다.

그래도 이번에 보내주신 것들은 거의 다 먹었다. 고추장만 빼고 말이다. 남아있는 고추장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이번에 담근 고추장이 맛있다며 굳이 보내겠다고 하셨고 남으면 제주도에 가지고 갈 요량으로 조금만 요청했는데 어머니는 김장 김치와 함께  년은 거뜬히 먹을 양을 보내주셨다.

부모님이 직접 키우고 만드신 것들이라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지만, 가지고 갈 여력이 없을뿐더러 가지고 간들 어차피 내가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깝고 또 아까웠지만 욕심을 내다가 버리게 되느니, 누구라도 맛있게 먹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결국 고추장모두 나누어 주었다.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가지고 가면 되지 왜 남을 주었느냐며 한동안 나무라셨다. 그것들을 가지고 가면 내 짐이 그만큼 줄어드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다.

짐을 줄이고 줄여서 여행 갈 때처럼 줄였다고는 하나, 남은 라면 등등을 챙기다 보니 어느새 캐리어가 가득 찼다. 물론 한 달쯤 지나면 사라지고 없을 것들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 있으면 룸 메이드 아주머니와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이곳에는 하루라도 투숙하고 체크아웃하면 침구를 모두 교체하고 있었다. 장기 투숙객인 나는 모든 침구를 매일 교체할 수는 없으니 베개커버만 바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었을 때였다. 침구 교체를 직접 하겠다고 시트와 이불 커버, 베개커버를 달라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을 줄여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다. 외국에서 그러면 보통 "네가 왜? 이건 내 일이야!"라고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곤 했었다. "며칠 연박이냐?"는 질문에 "한 달이요."라고 답한 이후부터 아주머니는 오가다 마주칠 때마다 나를 알아보시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갔나 보네?"
"네,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
"엥? 직장 다니는 거야?"
"네, 일 때문에 제주에 왔거든요."
"아~ 그래서 일요일에만 보였던 거구나."

그러곤 가실 것 같더니 다시 와서 물어보셨다.

"어디 다니는데?"
"그냥 봉사하러 왔어요."
"엥? 여기까지 와서?"
"네, 그게 제 꿈이었거든요."
"아~ 그래, 여기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긴 하지..."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하셨지만 과연 나를 온전히 이해했을까 싶었다. 가끔은 나도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알바는, 이곳의 적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 때문에 보다 나은 곳으로 떠나기 거였다. 그런 곳에 봉사자로 온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일하던 일주일간은, 나는 온전히 자원봉사하러 온 봉사자였지만 그녀가 떠난 지금은, 그녀가 받던 몫의 절반을 받으며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가 있을 때보다 방문객이 다섯 배가 늘어나면서 숨 쉴 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몇 명이나 이런 나를 이해해 줄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 행복해야 된다고 스스로 세뇌시키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도 이유도 모른 체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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