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우우우, 코끼리님 지나가십니다
@초베 국립공원, 보츠와나
시원하게 뚫려있던 도로가 갑자기 막힌다. 따로 신호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고가 난 걸까? 유리창 너머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주시하는데 사람들의 움직임이 요란하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가 하면 선루프 사이로 몸을 빼거나 지붕 위로 올라간다. 노련한 운전자는 시동을 끄고 허리를 뒤로 젖힌다. 뿌우우우. 낮고 굵은 튜바 소리를 따라가니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늠름하게 거리 한복판을 가로막고 있다. 그 틈을 타 제각기 다른 크기의 코끼리들이 줄지어 길을 건넌다.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녀석이 대장인가 보다. 밀린 자동차 무리를 향해 귀를 흔든다. 과거 앞 범퍼 아래로 코를 넣어 승용차를 날리는 코끼리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대장의 코가 분주해진다. 끝없는 행렬 속에 아기 코끼리가 아장아장 걸음을 옮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호기심과 경계 어린 시선을 다독이듯 엄마는 아가의 엉덩이를 코 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가족들이 무사히 건너자 마지막으로 대장이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모퉁이 표지판에는 ‘코끼리 통로’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리빙스턴에 머문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쉽사리 적응되지 않는다. 이렇게 지구 상에서 도심에 동물이 활보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중심가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야생 동물들로 넘쳐난다. 도롯가를 따라 걷는 얼룩말과 사슴은 보행자와 길을 공유한다. 커피를 마시러 방문한 호텔 정원에는 기린이 높은 나무의 풀을 뜯으며 활개 치고 있다. 잠베지 강기슭에는 하마와 악어를 조심하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보인다. 인간과 자연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생활하는 이곳에는 공존을 위한 나름의 규칙이 있다. 동물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다. 함께 쓰는 길에는 이정표를 만들어 운전자에게 주의를 주고 야생동물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 함부로 다가서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동물들도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주쳐도 대수롭지 않게 자기 할 일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터전을 공유하며 학습한 결과일 테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상생하는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오늘은 보츠와나의 초베 국립공원을 방문한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마사이마라, 세렝게티, 초베, 에토샤, 크루거 등 사파리를 즐길 수 있는 국립공원이 여럿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위치에 따라 기후와 식생, 주된 생물 등 생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베의 경우 초베강이 흘러 유량이 풍부하다. 동물들은 물을 찾아 이동하는데 넉넉한 수량을 보유한 이곳은 천국이 따로 없다. 초베의 상징은 코끼리이다. 모든 수식어 앞에 세계 최고가 붙는다.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코끼리종, 12만 마리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코끼리 군락지. 아침해를 배경 삼아 길을 건너던 코끼리 가족의 고향도 어쩌면 초베일지 모른다. 선착장 앞에는 여행자를 실은 모터보트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배편이 적어 재빠르게 승객을 내려주고 돌아온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다리를 놓아도 될 듯한데 바지런히 오고 간다. 건너편에 도착해서야 그 까닭을 깨닫는다.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불편한 지형이다. 물줄기 사이에는 초록빛 섬들이 떠있고 동물들은 강변과 섬을 넘나 든다. 가까이에서 관찰하려면 배를 타는 게 훨씬 유리하다. 보트 사파리가 가능한 이점은 초베의 특별함을 더욱 부각한다.
동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보트 사파리
그늘 아래에 천막을 씌운 미니 보트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승객들이 탈 때마다 좌우로 삐걱댄다. 연약한 배가 물살을 타고 흐르자 사바나의 볕이 쏟아진다. 나무가 적은 초베에서는 그늘이 없어 금세 살이 발갛게 익는다. 안쪽으로 몸을 숨기고 싶지만 나루터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장하는 생경한 동물들에 갑판 위에 걸터앉는다.
-건너 수풀 사이를 보세요. 악어가 누워 있네요.
선장의 손끝을 따라가니 과연 연녹색 악어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벌린 입 사이에는 제멋대로 난 하얀 이빨이, 등에는 공룡처럼 삐죽삐죽한 비늘이 있다. 자연에서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숨겨 원활한 사냥에 성공하도록 보호색을 띤 생물들이 많다. 먹이사슬 상위에 있는 악어 역시 그러하다. 풀숲과 똑 닮은 가죽은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렵다. 죽은 듯 멈춰있던 것도 잠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물속으로 미끄러진다. 깔때기를 타고 흐르듯 쏜살같이 강물로 흘러내린다. 먹잇감을 찾은 걸까?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 악어와 풀을 뜯는 버펄로
사라진 악어의 빈자리 너머 버펄로 무리가 마른풀을 뜯고 있다. 족히 열 마리가 넘는다. 야수처럼 양끝이 위로 말린 검은 뿔은 위압감을 주는 왕관이자 강인한 무기이다. 제대로 들이받으면 동물의 왕 사자도 꼼짝 못 한다. 버펄로는 뿔부터 꼬리까지 온몸이 검다. 레몬색 대지와 대비를 이루는 색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검은색 점들이 움직이는 듯하다. 뱃머리를 본류 방향으로 돌린다. 크고 작은 섬들이 총총이 이어진다. 옅은 바닥에 가로로 길게 누운 고목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거친 기둥 줄기의 결을 따라가다 메마른 눈빛을 발견한다.
-워터 모니터(Water monitor) 도마뱀이에요. 성체가 되면 2m까지 자라죠.
팔뚝만 한 굵기에 가슴께까지 오는 기다란 도마뱀은 고동색 나무껍질처럼 보인다. 한없이 게을러 보이는 인상과 달리 수영의 귀재라고 한다. 사바나의 포식자들은 은둔한 생활을 즐기다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나 보다.
또 다른 초원의 주인은 다채로운 빛깔의 새이다. 한 덩치 하는 동물들 사이로 들판 곳곳을 누빈다. 날개가 있어도 가까이 다가서기에 겁이 날 텐데 용감하게 틈바구니를 뚫고 자리 잡는다. 악어 뒤꽁무니에서 놀리듯 바닥에 부리를 쪼는가 하면 버펄로의 등을 타기도 한다. 제일 이목을 끄는 녀석은 노랑부리 황새이다. 나무 작대기마냥 가늘고 붉은 다리와 눈처럼 하얀 털로 자태를 뽐낸다. 날갯죽지는 흰 깃털과 달리 짙은 검은색이다. 누구라도 이 녀석을 보면 잊지 못할 게다. 한 뼘이 넘는 뾰족한 노랑 부리 위로 다홍빛으로 단장한 얼굴이 있다. 초원과 강물, 나뭇가지와 바위로 위장한 냉혹한 세계에서 새들은 자신의 존재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얇은 가지 위에는 한 손에 쏙 담기는 앙증맞은 크기의 킹피셔(kingfisher)가 올라타 있다. 인도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인 킹피셔는 이 자그마한 새에서 비롯되었다. 그럴만한 게 형광 청록색의 깃털과 오렌지빛 볼록한 배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눈으로 한참 색깔을 더듬는다. 초베에서 화려한 빛깔을 목격한다면 그건 분명 하늘을 누비는 새들일 테다.
나무를 닮은 워터 모니터 도마뱀과 화려한 노랑부리 황새
물의 양이 불어난다. 갑판에 부딪히는 물살이 거칠어진다. 강물이 점차 짙어지더니 늪처럼 끈적한 진흙밭이 나온다. 덜 굳은 아스팔트마냥 찐득한 잿빛 더미에 둥그런 덩어리가 보인다. 배를 가까이 붙이자 등허리까지 진흙을 뒤집어쓴 하마의 콧잔등이 보인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로 달궈진 체온을 낮추려 진흙 목욕을 즐기나 보다. 몸을 동그랗게 말은 모양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아이 같다. 하마는 매끈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을 만큼 점잖아 보이지만 실은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초베강 최상위 포식자이다. 성체의 체중은 2톤이 넘고 단단한 송곳니는 악어를 두 동강 내버린다. 보트 우현에 잔물결이 인다. 파동의 중심에서 거품이 일더니 일순간 머리가 솟아오른다. 제자리에서 회전을 거듭하다가 푹 꺼진다. 재빠르게 파도를 읽는다. 열 시 방향에서 다시 튀어나온다. 회색빛 얼굴 끝에 벌렁이는 콧구멍은 하마의 것이 분명하다. 서커스를 하듯 빙글빙글 돈다. 커다란 입을 쭈압 벌린다. 연분홍 입천장과 단단한 이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꽃봉오리를 펼치듯 화려하고 수중발레를 하듯 유연하다. 수면 위 하마의 머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깊게 벌어진 입매무새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진흙 목욕을 즐기는 하마와 강을 건너는 코끼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이 멈춰 선다. 초베를 향하던 길에서 만난 신호등이 또 켜졌다. 너른 초베강을 가로지르는 코끼리 행렬의 등장이다. 아침과는 달리 헤엄을 쳐서 건너고 있다. 오 톤이 넘는 거구가 둥둥 떠있는 장면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놀랍게도 코끼리는 타고난 수영선수라고 한다. 무거운 체중에서 비롯된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빨대처럼 기다란 코이다. 긴 코는 수영에 탁월한 신체조건이다. 잠수를 할 때 스노클링을 하듯이 끝부분을 수면 위로 내밀면 호흡이 한결 수월해진다. 건너 강둑까지 꿀렁꿀렁 늠름하게도 헤엄친다. 중간중간 아가가 가라앉을 때 가족들이 코를 뻗어 밀어 올려주는 모습은 놓칠 수 없는 별미이다. 먼저 도착한 아빠는 물을 털어내고 흙을 뿌린다. 수영을 마친 코끼리의 습관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새삼 깨닫는다. 정말이지 초베는 코끼리 천국이다. 언덕을 오르기도 진흙으로 목욕하기도 강을 건너기도 한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자. 뿌우우우, 코끼리님 지나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