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칸 마사지를 경험하려면 게임 드라이브가 제격이지
@초베 국립공원, 보츠와나
나루에 배를 대고 뭍을 밟는다. 보트를 타고 깊숙이 들어와 마주한 드넓은 대지는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한다. 푸르른 초베강과 강기슭의 쪽빛 수풀, 바싹 마른 노오란 수목과 주홍빛이 감도는 흙길은 수차례 찍어도 프레임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정성 들여 바라보고 마음에 간직해야지. 언덕을 오르자 하얀 지프차가 보인다. 튼튼한 몸체는 사방이 뻥 뚫려있다. 사파리용으로 만든 특수 차량은 밑단이 높아 시야가 탁 트인다. 운전석 뒤로는 양 옆에 지지대가 있는 길쭉한 의자가 3열로 놓여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오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등받이에도 쿠션이 있다. 지붕에는 하얀색 차광막이 덮여 있지만 사바나의 강렬한 태양을 막기엔 역부족일 게다. 디딤판을 밟고 올라 좌석의 끝자리를 차지한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은 출발과 동시에 두려움으로 뒤바뀐다. 안전벨트를 착용해도 낙폭이 큰 비포장 도로를 달리니 앞뒤로 좌우로 위아래로 제멋대로 흔들린다. 앞자리에 가로로 달린 바와 왼쪽에 기역자로 꺾인 철제봉을 꽉 쥔다. 잘못하면 튕겨나가겠다. 놀이기구를 타 듯 비명이 새어 나온다. 아수라장이 된 승객들이 익숙한지 드라이버는 사정없이 언덕으로 돌진한다. 진짜 오프로드에서 하는 게임 드라이브의 시작이다.
천장에 머리를 찧고 엉덩이에 불이 나고 팔뚝에 멍이 든다. 혼을 쏙 빼놓으며 거칠게 핸들을 돌리다가 동물을 발견하면 끼익 멈춰 선다. 신기하게도 어딜 가나 동물들이 쏟아진다. 동물원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하다. 특히 초베는 초식동물의 낙원이다. 풍부한 유량을 보유한 강의 영향도 있지만 초베 고유의 생태는 육식동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대개 육식동물들은 나무 위에 숨어 사냥감을 찾는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면서도 넓은 범위를 내다볼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먹이를 발견하면 뛰어내려 사냥을 시작하는데 키가 크고 튼튼한 나무가 있어야 한다. 초베는 우거진 나무보다 작은 수목과 덤불이 많다. 육식동물이 생존하기에 까다로운 조건이다. 더욱이 초베에는 육식동물이 좋아하는 얼룩말이 적고 임팔라로 대표되는 영양류들이 주로 서식한다. 영양은 순둥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쌔서 상대적으로 잡기 어렵다. 초베 특유의 환경은 육식동물의 번성을 가로막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맹수를 목격할 기회가 비교적 적어 아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숨 돌릴 틈 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에 초베의 풍경은 지루할 틈이 없다. 물가에는 워터벅 가족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나뭇가지와 꼭 닮은 뿔을 가진 스프링복은 덤불 사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톰슨가젤 부부는 등산 중이다. 초베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임팔라, 쿠두, 스프링복, 톰슨가젤, 워터벅은 영양류에 속하지만 생김새가 조금씩 다르다. 처음에는 다 똑같이 보이는데 꼼꼼히 뜯어보면 구분이 된다. 특징을 찾아 이름을 맞추는 재미가 쏠쏠하다.
- 뿔이 양옆으로 퍼지다 중간에서 위로 뻗은 게 임팔라 수컷이에요. 하프 모양처럼 생겼죠?
과연 엉덩이 양쪽에 검은 줄이 있으니 임팔라가 분명하다. 옆에 뿔이 없는 작은 녀석은 암컷인가 보다. 왼편에 우뚝 선 아이는 임팔라보다 덩치가 크고 튼실하다. 소처럼 보이기도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 무시무시한 뿔을 가지고 있죠? 빙빙 꼬인 뿔은 1미터가 훌쩍 넘어요. 그레이터 쿠두(greater kudu)라고 부르죠.
저 뿔에 받치면 바로 황천길이다. 초식동물이 온순하다는 편견은 게임 드라이브를 하며 완전히 깨졌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 대항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고 뿔로 무장한다. 휘두르는 뿔은 상대의 살갗을 찢고 장기 깊숙이까지 찔러 넣어 맹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노란 얼굴이 공중에 떠 다닌다. 나무를 뚫고 늘씬하게 뻗은 목은 단연 사바나에서도 돋보인다. 갈색 점박이가 박힌 노르스름한 몸체는 여기 번쩍 저기 번쩍한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빼꼼, 가지 사이에서 빼꼼, 차체를 막아서고 빼꼼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물가에서 멍하니 구름을 좇는 기린을 따라간다. 갑자기 배가 고픈 건지 곧은 목을 숙여 풀을 뜯는다. 긴 목 못지않게 쭉 뻗은 다리는 장애물이 된다. 좌우로 다리를 벌린다. 스트레칭하는 자세로 아슬아슬하게 각도를 늘리는데 보는 내가 다 불안하다. 겨우 검은 혀가 바닥에 닿는다. 머리가 땅에 처박힐 듯하다. 저토록 집착하는 걸 보면 특별한 무엇이 있는 걸까?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카메라 셔터를 연거푸 누르는데 화면 안으로 불청객이 들이닥친다. 초원의 무법자 코끼리님이시다. 이 구역에서 덩치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린과 코끼리의 대결에 이목이 집중된다. 눈빛이 교차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선공은 코끼리이다. 두꺼운 귀를 위협하듯 앞뒤로 펄럭인다. 깨갱, 기린이 황급히 달음박질친다. 다소 허무하게 승부가 끝나 김이 샌다. 코끼리는 기린이 애지중지하던 무언가를 코로 집는다. 자리를 내주었지만 미련이 남는지 물러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 가만 보면 동물의 왕은 사자보다 코끼리 쪽이 맞는 듯하다. 사실 왕보다는 악당에 가깝지만 말이다.
코끼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멀리서 지켜보는 기린
내리막을 달리던 사파리 차량이 크게 휘청인다. 바닥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오프로드라지만 이번 덜컹거림은 격이 다르다. 허리가 제대로 찍혔다. 안전바에 부딪히고 엉덩이가 들렸다 튕겨나갈 뻔하고 천장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탑승객의 민원이 속출하자 드라이버는 넉살 좋게 다독인다.
-이게 바로 아프리칸 마사지예요! 욱신대지만 또 받고 싶을걸요?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아프리칸 마사지는 게임 드라이브에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다. 허리를 매만지며 아득해진 정신을 가다듬는데 길을 따라 비비 가족이 지나간다. 담갈색 털과 새까만 얼굴을 가진 비비는 개코원숭이의 애칭이다. 제법 몸집이 크고 손아귀가 야무지다. 개코원숭이를 자극하는 일은 금물이다. 영리해서 얕보면 큰일 난다. 맞은편의 지프차도 멈춰 선다. 다들 숨죽여 눈으로 쫓는다. 뒤꽁무니를 따라가다 은근한 눈길에 시선을 맞춘다. 세상에, 조쉬자나! 앞 칸부터 살피니 모두 장기 하우스 식구이다. 어제 봉사활동을 끝마치고 아쉬운 작별을 했던 친구들을 초원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다들 반가움에 손을 흔들고 이름을 외친다. 재미난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양쪽에서 플래시 세례가 팡팡 터진다.
사바나 한복판에서 만난 친구들
들판이 노을로 타오른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품바가 내달린다. 힘 있는 달음박질은 영화 라이온 킹의 한 장면 같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검정색 털은 바람결을 타고 깃발처럼 휘날린다. 갈고리 모양으로 휜 뿔은 흑멧돼지의 강인함을 번뜩이게 한다. 품바를 따라 떨어지는 태양을 사냥한다. 가까이 갈수록 해님은 키를 낮추고 대지로 빛을 흩뿌린다. 푸른 사바나의 초목에 울긋불긋 물이 든다. 일몰은 초베에 단풍을 내린다. 선연하게 부서지는 석양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걸리는 곳 하나 없는 지평선과 고르게 퍼지다 소멸하는 빛과 이상하리 만큼 침묵이 내려앉은 대기는 주변을 고요하게 잠재운다. 모터의 소음과 왁자지껄한 음성과 번잡스러운 움직임을 삼킨다. 뒷덜미 너머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발자욱을 남긴다. 희끗한 하늘에 별이 점점이 박힌다. 초베에 밤이 찾아왔다.
초베를 물들이는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