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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작은 한국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by 지수



사각 테이블을 중앙으로 옮긴다. 부엌 식탁 밑과 창가 쪽에 밀어 넣은 의자를 모조리 빼내 탁자 주위를 둘러싼다. 여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기에는 공간이 넉넉지 않아 몇몇은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외출 후 돌아온 지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았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정렬을 가다듬는다. 투명한 카드 케이스와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칩, 그리고 매듭으로 단단히 묶은 고무줄 뭉치를 올린다. 능숙하게 인원수에 맞추어 칩과 매듭을 배분한다. 빠른 손놀림으로 트럼프 카드를 섞는다. 착착 착착 알맞게 맞아 들어가는 소리에 시동이 걸린다. 반으로 쪼개어 양쪽에서 차라라락 번갈아가며 놓는 모양이 마술사 못지않다. 네 장씩 받은 카드를 꼼꼼히 살피다 고심 끝에 두 장을 내려놓는다. 어디 보자, 누가 선(先)이지? 스페이드 에이스 위에 두 손가락을 올려놓고 여유롭게 톡톡 두드리는 걸 보니 기선제압을 하려나 보다.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이다. 머리싸움과 계략이 난무하는 이곳은 케이프타운 속 작은 한국이다.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케이프타운 아파트는 공간이 효율적이고 늘 먹을 게 넘쳐 난다.


열흘 전 잠비아에 있을 무렵 준민이에게 연락이 왔다. 케이프타운에서 머무르는 시기가 겹치니 숙소를 함께 쓰자는 제안이었다. 잔지바르에서 동행한 준민이와 명순 언니,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 셋과 아파트를 렌트하는 계획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마지막 여행지라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다는 생각에 항공권만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숙소나 교통편, 관광지 등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황이라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어떻게든 되는구나 싶었다.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올려다보니 서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현대식 건물이 네온사인을 빛내고 있다. 노란 조명의 프런트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기다란 통로에 줄지어 호실이 있다. 끝으로 갈수록 커지는 숫자를 따라간다. 낯선 친구들과의 만남에 긴장감이 약간 맴돌지만 힘차게 문을 밀친다.


한인 마트에서 공수해 온 식재료로 매일 밤 한식 파티가 열린다.


상냥한 인사보다 먼저 말을 건네는 건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를 끝마치기도 전에 현관 너머 부엌으로 시선이 간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누런 된장에 가슴이 빠르게 뛴다. 이게 얼마만의 한식이야. 한국에서 챙겨 온 걸 간간이 먹었지만 어디까지나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간편식이었다. 양은 모자라고 맛은 아쉬웠다. 한식당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기 전까지 한식다운 한식은 못 먹겠구나 싶었는데 주부 9단 명순 언니가 솜씨를 발휘한다. 케이프타운은 대도시라 한식당도 있고 한인마트에서 식자재를 구할 수도 있다. 캐리어와 배낭은 신발 옆에 던져버리고 주방으로 뛰어든다. 선홍빛 삼겹살이 가지런히 누워 대기 중이다. 집게로 윗부분을 집어 팬에 놓는 순간 지글지글 기름을 튀기면서 노랗게 익어간다. 한 입 크기로 다듬은 양파와 마늘도 기름 목욕을 기다리고 있다. 절로 군침이 돈다.


황급히 손을 씻고 저녁을 준비한다. 기다란 테이블 위로 접시 가득 담은 상추와 양배추, 볶음김치를 내려놓는다. 꾹꾹 눌러 담아 밥을 퍼고 쌈장도 듬뿍 담는다. 봉지를 길게 뜯어 김을 산처럼 쌓으니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온다.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했는데 수저를 전달하고 흡입한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지 싶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여행 내내 한식에 굶주린 여섯은 하이에나처럼 식탁을 공략한다. 상추 위에 고기를 한 점 올리고 마늘과 양파를 탑처럼 쌓는다. 영롱한 빛깔의 발간 쌈장으로 모자를 씌운 후 이파리로 덮어주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기름 많은 삼겹살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데는 볶음김치가 최고다. 고봉밥 숟가락 위로 윤기 흐르는 볶음김치를 얹으면 김치 특유의 매콤함과 시큼함이 입안에 감돈다. 거기다 된장찌개의 진한 국물을 연거푸 덜어먹으면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젓가락이 없어 포크로 쿡쿡 찍어가며 사냥을 하지만 며칠 굶은 사람 마냥 정신없이 휘저은 식탁은 전쟁을 치른 듯 초토화된다.


우리는 항상 먹을 것에 진심이다. 아침부터 거하게 한 상을 차린다.


6인분 설거지 거리를 토해내는 싱크대를 뒤로 하고 1층 거실로 집합한다. 아파트는 복층 구조로 1층에는 주방과 화장실, 거실 겸 침실이 있고 다락방처럼 천장이 낮은 2층에는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1층 침대 사이에 테이블을 놓고 둘러앉는다. 우리만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후에는 여지없이 저녁 설거지배 포커 대회가 열린다. 먼저 재빠르게 칩과 매듭을 나눈다. 매듭진 고무줄 다섯 개는 동그란 칩 하나와 같다. 네 장씩 받은 카드를 확인하며 전략을 짠다. 점수가 높은 카드로 게임을 이끌어갈지, 좋은 카드를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크게 한 방을 노릴지를 결정해야 한다. 게임을 하면 각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자신의 전술을 일부러 드러내며 다른 사람의 빠른 포기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결정적인 패를 공개하지 않다가 판을 뒤엎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점수를 얻기 쉽지 않을 때 허세를 부리며 칩을 과감하게 던져 쉽게 게임을 접수하는 프로가 있는가 하면 빠른 퇴장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플레이어도 있다.


귀찮은 설거지나 심부름에 재미 요소를 넣으려는 시도는 우리를 빠르게 중독시켰다. 포커는 빠뜨릴 수 없는 하루 일과로 자리매김한다. 여행 막바지라 다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기도 하고 이미 많은 것을 보고 즐겼으니 그다지 욕심이 없기도 하다.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돌아오면 5분 간의 정리시간 뒤에 바로 착석해야 한다. 모이기만 하면 판을 깐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설거지에서 시작한 대회 목적은 식사 준비, 장보기, 심부름으로 확대된다. 나중에는 이름을 줄여 부르고 묶어서 한 방에 여러 개를 해결하기도 한다. 아준(아침 준비), 아설(아침 설거지), 저장(저녁 장보기), 저설(저녁 설거지), 젤사(젤라토 사 오기) 등 온갖 명분으로 진행한 내기는 몰입감을 높여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그다지 싫지 않은 일들을 아쉬움과 분함에 떨며 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말이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포커 게임에 임하고 있다.


우리 여섯 모두는 각자의 방식과 일정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해 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목격하기도,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체험의 장이 펼쳐지기도,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아 겪을 수밖에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도 있었을 테다. 인연의 옷깃이 닿아 마지막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낯선 환경에서 받은 짜릿한 경험 못지않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장소를 방문하였기에 공유할 수 있는 생각, 비슷하지만 또 다른 감정의 폭과 결, 웃지 못할 좌충우돌 에피소드까지 합쳐져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운 고향의 맛과 언어는 그간의 피로와 긴장을 녹여내고 마음의 울림을 담담히 풀어내게 하였다. 결국 여행도 사람인가 보다. 케이프타운 속 작은 한국에서 숨을 고르며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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