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에 영배는 이유 모를 안도를 느꼈다.
‘쏙쏙 들리는 동요곡집’
마침내 원하던 악보집을 찾아낸 김영배는 허리를 폈다. 유명해진 동요들만을 모아 낸 기타 반주 악보집이었다.
영배의 음악 철학에서 피아노 반주는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에 너무 요란했고 악기 자체도 위압적이었다. 피아노 앞에 서서 선생님의 반주를 따라 노래하던 기억은 편안하지 않았다. 서 있으려니 괜스레 긴장됐다. 피아노는 7살 소년에게 거대한 검은 괴물처럼 느껴졌다. 울림 풍부한 아름다운 소리에 목소리가 묻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배가 그리는 이상적인 아이와의 노래 부르기 활동에는 기타가 동반되었다. 아이는 반주자 옆자리에 앉는다. 앉은 자세가 노래 부르기에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닐지라도 아이가 편안한 것이 우선이었다.
한가한 딩기딩기 기타 소리에 맞춰 손주가 다리를 달랑대며 노래 부르는 풍경. 딸이 아기를 가졌을 때 영배가 꿈꾸던 주말 오후였다. 아쉽게도 해인은 제 아빠를 닮아 지독한 음치였고 노래나 음악 학원보다 태권도장 가기를 더 좋아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영배가 악보를 한 장씩 넘기던 때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평소처럼 통화 버튼을 터치하자 해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할아버지!”
“어어 해인아. 잘 도착했지?”
해인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아침 10시인데. 거긴 몇 시야?”
“오전 11시가 좀 지났다. 아침은 먹었고?”
“먹었지! 벌써 수업도 듣고 잠깐 쉬는 시간이야. 할아버지, 나 공항에서 할아버지 주려고 뭐 샀다?”
핸드폰을 거치대에 세워두고 해인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한참 요란스럽게 부스럭대다가 아이는 빈손으로 나타났다.
“아냐. 한국 돌아가서 직접 보여줄래. 비밀이거든.”
“뭘 샀는지 할아버지가 너무 궁금한데.”
“진짜 비밀이야. 가방에 숨겨두고 안 꺼낼 거지롱.”
해인이 혀를 빼꼼 내밀었다. 영배는 지난 며칠 동안 겪은 초조함과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을 받곤 소파 밑에 기대앉았다.
“할아버지 심장마비 오기 전엔 알려줘야 할 텐데.”
“할아버지 심장은 튼튼하잖아. 그런 거 갖고 멈추지 않아.”
병 얘기를 하려니 영배는 문득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일이 떠올랐다.
“맞아 해인아.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다면서. 백 영감한테 들었다. 상처는 잘 나은 게지?”
해인에게 어린아이 특유의 거짓말을 시작하려는 어색하고 긴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별안간 시선을 피하며 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응.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많이 안 아파.”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인 영배가 더 물어보려는 순간 화면 밖에서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헤이즐을 불렀다. 해인이 새로 지은 영어 이름이었다. 해인의 안도감은 미처 감추지 못하고 생생하게 드러났다.
“할아버지 나 가봐야 해. 버드랑골 백 영감하고 쭉 친하게 지내야 해. 알겠지?”
영배가 작별인사를 겨우 하자마자 통화가 종료되고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영배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해인의 한마디를 곱씹었다. 나는 많이 안 아파. 우리말은 조사가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 오만가지 뉘앙스를 나타내는 것이 참 신기했다. 나는 많이 안 아파. 그럼 많이 아픈 누군가는 따로 있다는 뜻인지. 나 많이 안 아파. ‘는’만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영배가 이렇게 찝찝할 이유는 없었다.
점심은 꽁치찌개를 끓여 먹기로 했다. 하나 남은 꽁치캔을 꺼내고 물을 올리며 영배의 생각은 다시 버드랑골 백 영감으로 흘러갔다.
공원에서 만난 날 해가 기울자 날이 추워졌다. 춘길은 집에서 몸을 녹이고 가라고 제안했다. 영배가 순순히 그러자고 하자 그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졌다.
공원에서 시장을 통과해 영배가 혼자 올랐던 길을 둘이 걸었다. 하얀 김이 추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마치 환상동화 속 안개 나라를 보는 듯한 만두 가게에서 왼쪽. 고소한 콩물 냄새가 가득한 손두부집에서 오른쪽. 저녁반찬을 사려 종종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거슬러 올라갔다.
영배는 춘길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춘길이 내놓는 대화거리가 편안했을 뿐이었다. 그는 편안함에 몸을 맡기고 춘길이 능숙한 조타수처럼 단어와 문장과 주제 사이를 항해하게 했다.
춘길의 집은 반나절 내내 사람이 없었음에도 아늑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춘길이 홍차를 우리러 간 사이 영배는 응접실을 서성였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자꾸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유리장식장 안에 들어있는 도자기들, 유난히 화려한 서가에 꽂힌 금박 한문 제목이 달린 책. 제자들인지 꽃다발을 든 젊은 사람들과 찍힌 사진 액자들. 어쩐지 영배는 위압감을 느꼈다.
춘길은 대학에서 국사를 가르친다고 했다. 영배와 달리 아직도 돈을 벌고,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질투가 불쑥 고개를 든 것은 그쯤이었다.
춘길의 대문 앞에서 참치캔을 본 길고양이 심정이었듯 영배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춘길은 편안한 태도와 교양 있는 말솜씨를 가졌다. 세월이 흘렀다고 아무나 갖지 못하는 현명한 노인의 분위기도 있었다. 그의 매력은 사람을 끌어 들었고 해인에 이어 영배까지 홀린 참이었다.
질투심은 젊을 때와 달리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영배가 느낀 초라함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려나.’
영배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노인. 얼굴을 튼 여자아이의 할아버지. 우연한 기회로 사귄 친구. 마지막 가능성에 다다르자 그는 부끄러워졌다.
응접실을 살피던 영배의 눈길에 뭔가 잡혔다. 탁자에 올려둔 먹다 남은 술빵이었다. 뜯어먹은 흔적 없이 정갈하게 잘린 단면을 갖고, 예쁜 꽃무늬 접시에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영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덮개였다.
춘길은 손잡이가 달리고 좀 눌린 반구 형태의 유리로 술빵을 덮어놨다. 나중 언제라도 먹고 싶어 졌을 때까지 선물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그 모습에 영배는 이유 모를 안도를 느꼈다.
거대한 안도감은 김영배가 그날 느낀 모든 질투와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집어삼키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