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번째 메시지

시종일관 미소가 입가에 떠다녔지만, 영배는 춘길의 눈만 바라봤다.

by 두밥

편지에 답장이 오지 않았다. 김영배는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도 걱정이 커서 지금 그가 사랑에 빠진 10대 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정오, 해인의 세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구가 되는 비법>
3번. 마음을 담아 편지 보내기 (문자도 ok)


영배는 영어와 친하지 않았으나 작은 알파벳 두 개를 문자도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번에 그는 해인에게 전화해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순순히 문자 어플을 열었다. 전날 저녁때 춘길이 남겨준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깜박이는 파란 커서를 노려봤다. 무슨 말을 쓸지 감이 안 잡혔다.


‘마음을 담아 보내는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까?’


마음. 해인은 마음을 담으라고 콕 집어 지시했다. 당연히 춘길에 대한 그의 마음일 것이다. 영배는 지난 만남을 되짚었다.


전날 영배와 춘길은 더 이상 저녁 식사를 미룰 수 없을 때까지 오래도록 담소를 나눴다. 춘길의 집에 이렇다 할 반찬거리가 남아있지 않아 밥은 각자 먹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대화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어질 수 있는지 영배는 처음 알았다. 단순히 춘길의 말솜씨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 말을 하다 보면 영배의 어조는 부드러워졌고 표정이 풀렸다.


둘은 오래 사용한 관절을 생각해 앉아 있다가 집을 거닐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걸을 때 영배는 보통 뒷짐을 지고 걸었다. 오지랖 부리길 극도로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뒷짐 진 손을 누군가에게 내미는 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뒷짐이 풀릴까 왼손으로 오른손을 꼭 쥐었다. 뒷짐은 집 구경을 마치고 자리에 앉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풀린 적이 없었다.


반면에 춘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아주 느리게 걸었다. 앞에서 맞잡은 두 손은 딱히 비굴하지도 과하게 공손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러웠다. 마치 두 손을 모으고 태어난 듯 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 손은 자주 풀어졌다. 영배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을 서가에서 찾아낼 때, 유난히 영배의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사진을 설명할 때. 문을 먼저 열어줄 때, 베란다에서 키우는 몬스테라의 윤 나는 잎사귀를 만지작거릴 때.


그 차이를 알아차린 영배는 춘길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반창고도 같이 떠올렸다. 춘길을 처음 만난 날부터 반창고는 새것으로 갈아질 뿐 항상 비슷한 자리에 있었다.


상처는 유난히 오래갔다.


스쳐 지나갔을 뿐인 사람들의 말이 영배에게 오랜 상처로 남았듯, 춘길의 손도 잘 낫지 않았다. 영배가 자꾸 춘길의 상처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잘 낫지 않는 상처를 돌보는 법을 몰라 그는 그것을 숨겼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상처 대신에 도움의 손길을 건넸을 말들도 듣기를 거부했다.


그 닫힌 문을 춘길이 다친 손으로 조금씩 열고 있었다.


영배는 그런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춘길의 손이 다 낫고, 그의 뒷짐이 풀리는 어느 날을 그리며 익숙하지 않은 자판을 천천히 눌러썼다. 오타가 없는지 비문을 썼는지 꼼꼼하게 살핀 후에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날 춘길은 영배를 대문까지 마중 나와 지나가듯 말했다. 내일도 점심 먹고 공원에서 보자고. 이번에는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영배는 그때 그가 언제 나오든 춘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춘길에게서 답장이 오면 공원으로 가야겠다. 초록색 메시지가 화면에 뜬 것을 보고 영배는 결심했다. 그가 전한 마음에 대한 답을 듣기 전까지는, 춘길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답장은 오후 내내 오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2에서 3으로, 3에서 4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동안 영배의 마음은 널뛰기를 반복했다.


의사가 진단한 영배의 마음은 우울증에 걸린 상태였다. 그가 아는 자신의 마음은 우울하다기보단 무기력한 것에 가까웠다. 가끔씩 생각도 멈추고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한 채 몇 시간이고 흘려보낼 때가 있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종국에는 과거의 불쾌한 기억이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치곤 했다.


춘길을 알고 나서는 하루하루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흘러가는 시간이 소중했고 매 순간의 감정이 생생했다. 그 감정이 좋든 나쁘든 영배는 그의 삶이 전보다 알록달록해진 점이 마음에 들었다.


춘길의 답장을 기다리는 지금 영배의 방어기제가 다시 작동되었다.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 상황에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 초반의 불안함은 점점 사라지고 영배는 시간의 흐름을 점점 놓치기 시작했다.


작은 바늘이 5와 6 사이에 다다랐다. 창가 배관에 까치가 앉아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영배는 움츠렸던 몸을 펴고 주위를 둘러봤다. 방에 드리운 햇살이 온기를 잃은 채 크게 기울어 있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까치가 놀라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날아갔다.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와 1층 베란다에 빨래를 널던 여자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피면 어떡해요! 요 아파트서 살지도 않잖아 당신!”


삶의 감각은 한꺼번에 영배에게 닥쳐왔다. 그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사람처럼 휘청거리다 분노에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해 옷을 챙겨 입었다. 몇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현관을 나섰다. 5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계단을 평소와 다르게 성큼성큼 밟았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자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그의 눈치를 봤다. 빨래 널던 여자는 같은 주민으로서 영배가 한소리 더 해주길 은연중에 기대하는 듯했다. 영배는 못 본 척 지나치려다 마음을 바꾸고 뒷짐을 풀었다. 괜히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연기가 5층까지 올라와서야, 원.”


뻔히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 영배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6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공원은 한산했다. 해가 떨어지고 날이 추워지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가로등에는 벌써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불빛에 의지해 벤치에 앉은 춘길이 책을 열중해서 읽고 있었다.


영배가 옆자리에 앉자 춘길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지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걱정스러운 물음에 영배의 속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풀렸다. 춘길은 그를 기다리느라 추운 날 딱딱한 벤치에 앉아 그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고 있던 것이다. 벗 삼을 말동무 하나 없이 책 한 권을 들고. 영배가 더듬더듬 내뱉은 말들은 제대로 된 사과가 못 되었다. 춘길은 처음에는 심각하게 듣다가 연유를 알고 난 뒤로는 미소를 되찾았다.


“핸드폰을 한 번 봐도 될까요?”


잔뜩 풀이 죽은 영배가 건네준 폰에서 춘길은 쉽게 문자 어플에 들어갔다.


“아이폰에서 장문 메시지는 데이터를 켜야 보내져요.”


“그건 딸내미가 돈 나간다고 켜지 말라고 했는데….”


“잠깐은 괜찮아요. 긴 문자 보낼 때만 켰다가 보내지면 바로 끄면 돼요.”


과연 막대그래프 모양 버튼을 터치하니 메시지가 보내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춘길의 핸드폰에서도 수신음이 울렸다. 영배는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한숨을 깊게 쉬었다. 해인 덕에 나름 이런 분야에서는 또래보다 능숙하다고 자신했는데 아니었나 보았다.


“영배 씨만 괜찮으면 지금 읽어봐도 될까요?”


영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춘길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시종일관 미소가 입가에 떠다녔지만, 영배는 춘길의 눈만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도, 핸드폰 화면에서 나온 빛도 아닌 반짝이는 무언가가 까만 눈 안에서 뛰놀고 있었다.


영배는 몰랐다. 춘길이 가끔씩 훔쳐본 그의 꼼지락대는 손에도 비슷한 것이 깃들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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