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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Feb 12. 2019

친구와 수다, 이런 게 행복이지

9일차 #1일1글쓰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나는 친구가 있다. 이번에는 두 계절이 지나서야 만났다. 처음에는 약간 망설였다. 달라져버린 내 삶과 친구의 삶이 만나는 접점이 있을까 괜한 걱정을 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는 게 취미라...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지하철로 광화문까지 이동했다. 집에만 머물러 있었더니 공사 중이었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환승역이 지난 9월에 공사를 끝내고 환승이 가능해졌다. 시간이 빠르게도 흘러간다.


친구는 칼퇴근을 못한 관계로 내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전에 카페 손님이 알려줬던 일민미술관 카페 이마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광화문역 5번 출구로 나오니 카페 이마였다. 북적거리는 광화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한적했다. 마치 한남동 같달까. 분위기가 우선인 여성들에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한다.


각종 SNS에서 일민미술관 함박스테이크가 고기가 퍽퍽하고 별로라는 이야기도 많고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갈까 말까 하다가 날씨가 한파라 우리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박스테이크는 맛있었다. 클래식하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이라이스 소스 같은 데미그라스가 넉넉하게 고기를 품고 달짝지근한 양배추 샐러드와 반숙 프라이 그리고 적당한 밥은 허기진 우리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다. 단 반찬으로 나온 시중에 파는 피클은 피자집에서나 줄 법한 식감이라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어찌나 그 친구를 만나는 게 오랜만인지 우리는 근황 토크부터 시작했다. 2월이면 일한 지 1년이 된다는 친구는 다음 스텝을 고민 중이었다. 친구는 아기가 잘 크냐며 녀석의 안부를 물어줬다. 나는 직장생활에 대해 질문했다. 6년 정년퇴직을 남겨둔 리더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안타까웠다. 꼰대는 시간이 만드는 걸까 아니면 나이 먹어 가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일민미술관 카페는 9시까지만 운영해서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베이글 맛집으로 유명한 포비 베이글로 갈 계획이었는데, 사람이 넘쳐서 앉을자리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친구와 나는 수수커피를 갔다. 반대편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셔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알레르기 비염으로 우유 메뉴를 빼곤 마실 게 아메리카노뿐이었다. 크림 메뉴는 6천 원을 넘어가는데 그 가격을 내곤 마시고 싶지 않았다. 무슨 똥고집인지 이날은 그랬다.


아메리카노는 식상하니 롱블랙을 시켰다. 나는 어설픈 지식으로 아메리카노 제조법과 반대로 하는 게 롱블랙인 줄 알았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물으니 아메리카노보다 더 진한 맛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는 일이 줄어든다. 그래서 친구가 귀하다. 마음껏 편하게 반말도 할 수 있고, 같은 시대를 살았단 이유만으로 많은 부분이 이해된다.


두 계절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압축해서 들었다. 친구는 평일 저녁마다 카피라이팅과 기타를 배운다. 주말에는 교회 찬양팀 연습으로 시간을 보낸다. 육아만 하는 내 상황과 다른 친구의 일상은 바빠 보였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의 준비를 시작한 친구를 응원했다.


친구에게는 음악 기타를 연주하는 일이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이라면, 나에겐 그것이 글쓰기였다. 친구와 나는 세상에서 우리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한 무기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친구는 얼마 전에 청소를 하며 짐 정리를 통해 관계의 의미를 돌아봤고 나는 명함을 버리면서 그가 느꼈을 감정의 결에 동의했다.


저녁 약속은 아침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인데 시간이 뒷받침해주지 못한단 느낌이었다.


친구의 사적인 관계들에서도 보이지 않는 균열을 발견했다. 한동안 자주 만나는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그게 생을 거스르지 않는 방법인가 보다. 관계가 소홀해지는 순간에 잠깐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나만 겪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친구는 새롭게 만난 기타 선생님과 새 관계를 배워나가고, 나는 엄마들 모임과 글쓰기 모임에서 새 관계를 배우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교보문고 문 닫기 15분 전, 친구는 박준 시인의 새 시집을 샀다. 내가 아는 박준 시인을 그가 알고 있단 사실만으로 즐거웠다. 쉼보르스카도 좋아할 것 같아 친구에게 강력 추천했다. 취향이 같다는 건 때론 위험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페미니즘 책만 보다가 시집을 읽으니 없던 감수성이 촉촉해지는 느낌이었다. 내일은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볼 계획이다.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친구집이 가까운 '합정'에서 즐거운 3시간을 기약했다. 다시 만나,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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