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8~12 #쓰는사람 #공동육아 #텃밭라이프
5/8
2012년 11월 14일
한 줄도 못 쓰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다. 방청소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너무 싫었다. 밥하기도 설거지하기도 너무 싫다. 저녁빛이 깃든다. 오늘이 저문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허수경 유고집)
1달에 1번 정도 만나는 친구랑 밥먹고 차마시는 루틴이 지루해서 시집을 같이 읽는 중이다. 5월엔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읽기로 했다. 5문장쓰기를 계속 하면서 글태기인지 망태기인지 이거 해서 뭐하지, 내 감정쓰레기통인가 약간 아리까리할 때가 있었다. 5문장이라도 하루에 안쓰면 휘발되어버리는 일상이, 아니 소중한 하루가 싫었다. 5문장 이상 쓸 때가 많지만 그렇게라도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다고, 살고 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브런치 플랫폼에 가장 꾸준히 올렸던 5문장쓰기. 어느 순간에는 전문가인척 하고 싶었던 회사 관련 일만 올리다가 거길 퇴사하니까 내 정체성이 약간 난해해졌다. 그래서 그냥 다시 5문장쓰기를 1주일에 한번씩 묶어서 올렸다. 내겐 감응하는 순간들이 참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런 내 감응 따윈 별로 원하지 않는단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읽으면서 그녀가 써내려간 흔적들에서 꽤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시인인데 한 줄도 못 쓰는 날이 있었고 밥하는 것과 설거지를 너무 하기 싫다고 쓴 문장을 보니, 내 5문장쓰기도 나중에 유고집에 넣으면 되겠지 싶었다.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은유가 말했지만 글쓰는 걸로 돈을 버는 일은 현실이었다. 엄청 글로 신나게 까이고 다시 글을 쓰는 삶으로 회귀하거나 돌아가는 일에 대한 갈망이 일차원적으로 줄었다. 글은 내게 밥벌이가 아니라 보조수단처럼 여겼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삶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잘 못잡겠다. 잡고 싶지 않을 걸지도 모르겠다.
물류창고에서 말도 안되는 엑셀파일 보는 건 정말 토나올 정도로 싫은데 대안이 딱히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심정이다. 다시 글쓰는 일로 돈을 벌어볼까 하고 검색창을 기웃거려보지만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글쓰기의 허무함 이런 거다. 허수경 유고집 보면서 조금 다독인 마음이지만 여전히 마음밭은 우둘투둘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긴 한 걸까.
5/9
어린이집 소위모임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어하는 근황토크. 또 나는 텃밭에 어떤 작물을 심었는지 그리고 콤부차 스코비를 키우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한 명이 뭔가 키우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다기보다 아직 그 모임에서 정착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근황토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른들 사이에서 신뢰란 무엇일까 친하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이 또 마구 생겼다.
아이를 출산하고 쭉 가나안성도 뭐 이런식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1월 중순부터 매주 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고신자인데 새신자교육도 지난주에 수료했다. 새로운 소그룹에 들어갔는데 시작부터 괴롭다. 중고신자로 종교를 처음 믿는 사람처럼 바뀌었는데 갑자기 약간 뭐랄까 홀리한(?) 신성한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카톡창에 오가니까 조금 오글거린다. 내가 잠시 아이를 출산하고 종교와 멀어진 이유는 현실감각의 부재 때문이었다.
난 출산하고 몽상가에서 땅에 발붙이고 사는 현실주의자가 됐는데, 종교는 계속해서 내게 하늘의 것을 보라고 고난을 붙들고 기도하라고 그런 이야기만 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돌아갔냐면, 여전히 영적인 것들에 대한 내안의 갈망을 보았다. 봤으니 외면할 수 없었다. 단지 다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봉사로 헌신하며 이런 모양이나 아웃풋을 내고 싶진 않다. 신이 내게 원하는 건 뭔지 일단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 건 껍데기가 아니다. 죽기 전까지 알맹이만 찾다가 끝날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5/10
아이를 등원시키고 텃밭에 다녀왔다. 지난 연휴 때 비바람에 날아간 퇴비뚜껑을 비닐로 바꾸었다. 그리고 새로 커피찌꺼기를 보충했다. 이걸로 퇴비를 만들려면 1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한데, 6월에나 쓸 수 있을 것 같다. 새 볏짚도 추가해서 넣었다. 씨생강을 심고 볏짚으로 잘 덮어줬다. 생강은 처음 심는데 꽤 늦게 싹이 나는 작물이라고 들었다. 나뭇가지로 세워둔 완두콩 지지대도 농장 철제봉으로 바꾸었다. 혼자서 하니까 밭이 드넓게 느껴졌다. 같이 해야 덜 심심한데 밭메이트와 시간 맞추는 게 쉽진 않다. 그래도 아직까지 무탈하게 서로의 텃밭을 지켜주고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