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언제쯤 영약해지려나
최근에 마크로비오틱 자연요리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마크로비오틱이란 동양의 자연사상과 음양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식생활법이다. 그러니까 통곡물을 먹고 채소의 뿌리까지 웬만하면 섭취하고 제철음식을 먹고 하는 거다. 티랑 음식이랑 페어링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예전에 관심있었던 영역을 공부했다.
맛있게 현미밥을 짓는 법을 배우고 다시마와 표고버섯으로 채수를 내고 맛간장을 만드는 방법 등을 배운다. 비건은 아닌데 중용에 해당하는 식재료(채소, 두부, 해조류, 된장)로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음과 양의 조화대로 양파 하나 써는 걸 배우느라 오지게 혼이 났고, 매번 긴장의 연속이었다. 불조절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차가운 식재료 넣고 센불, 끓으면 바로 중약불, 간은 맨 마지막에 하기! 이런 게 별 게 아닌데 별 거다. 배우면서 요리의 기본(?)을 제대로 익혔다고 해두자.
역시 나는 요리보다 마시는 음료쪽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마시는 게 더 좋아! 술도 못하지만 목테일, 티칵테일을 위해 조주기능사나 배우러 갈 걸 그랬나.
7주동안 30여 가지가 넘는 자연식요리를 배웠다. 자격증의 딜레마는 배우고 나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 않은가. 그런 찰나에 마크로비오틱 비건 관련 쿠킹공방에서 아르바이트 공고가 났다. 사실 지원할까 말까 고민했다.
이유는 일단 집에서 1시간이나 걸려서 멀다는 느낌이 있었고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이다. 부수입을 얻을 목적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내게 맞는 일자린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내가 배운 마크로비오틱 쿠킹스튜디오랑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은 시간낭비였을까.
약속한 시간에 도착해서 면접을 봤다. 면접 후에 가장 내가 뜨악한 지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솔'톤으로 쿠킹클래스에 오는 어른들의 원데이클래스 수강생들을 위해 인사하고 서비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솔톤, 솔이라고 하는 계이름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솔톤 나랑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음역대다. 물론 돈을 받으면 할 수 있지만 약간 소울리즈좌처럼 행동할 수 있다. 남편이 하는 가게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일단 알겠다고 메모했다.
둘째, 내 일은 9,700원짜리였다. 내가 맡은 업무는 쿠킹클래스 보조 그러니까 쿠킹클래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스템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5시간, 1시간은 재료준비, 마무리 1시간은 청소, 중간은 수업보조 형식이었다. 재료준비는 그렇다치고 마무리 1시간 동안 해야할 일들이 엑셀파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야할 일의 양은 9,700원을 넘어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각종 청소는 마무리라는 이름으로 퉁쳤지만 과하게 많았다. 알코올로 소독까지 개수구 등 소독해야 한다는 말에 내적으로 혀를 내둘렀다. 우리집도 알코올로 소독은 안한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올라와서 발설될 뻔했다.
이곳에서 나를 좋게(?) 봐서 일하자고 해도 안갈 것 같다. 나는 맛있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 학원처럼 원데이클래스가 돌아가는 게 궁금한 인간은 아니었다. 마크로비오틱, 티소믈리에 모두 클래스를 운영해야 하는 입장인데 난 선생될 상은 아닌데...쿠킹클래스인데 요리는 못해도 된다니 아이러니했다.
내가 추구하는, 궁금한 요리클래스는 맛있는 걸 배울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이번에 마크로비오틱 요리도 정말 맛이 없었다(간혹 괜찮은 음식도 있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이 간간히 있었다). 하긴 맛있었으면 음식점을 하지 왜 쿠킹스튜디오를 하는 것인가.
나이도 어느 정도 먹고 현실에 구르고 굴러서 노련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나는 애송이였다. 약자였고 일개 노동자일 뿐이었다. 노동자는 고용주에겐 언제나 을이었다. 9,700원이라는 시급이 씁쓸해서 헛웃음이 났다. 9,700원을 벌러 일을 더하느니 돈을 안쓰고 말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왜 이렇게 세상 물정은 멀게만 느껴질까. 부동산 공부를 하면 뭐 하나 자본주의 시스템 탑재가 더딘데...
사실 오늘 기도하면서 갔던 자리였다. 날 향한 신의 뜻을 알고 싶었다. 신의 뜻이 없을 수도 있다.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시점인데 잔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