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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추억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_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경

by 전애희
1758753533790.jpg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_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경 캔버스에 유채 | 116x81cm |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


피아노의 추억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와 냄새가 뒤엉킨 시장을 지났다. 점점 조용해지더니 차 두 대 정도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중심으로 절지동물들의 다리처럼 오른쪽, 왼쪽 골목들이 나타났다. 왼쪽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섰다.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내 눈앞에 꽤 넓고 긴 골목이 등장했다. 골목길을 중심으로 담장으로 어깨동무를 한 이층 집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두리번거리다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집들보다 살짝 높은 지대에 단독주택 한 채가 있다.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이면 골목길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공놀이하는 아이, 줄넘기하는 아이, 술래잡기하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내 또래보다 더 높은 학년의 언니, 오빠들이 많았던 골목길. 그중 장난꾸러기 세 쌍둥이 오빠들의 모습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세 쌍둥이 오빠들은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 같았다. 세 쌍둥이를 부르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매일매일 골목을 돌아다녔다. 어둠이 깔리면 하나 둘 대문이 닫히고, 골목길에는 돌멩이들만 굴러다녔다. 이 소란스러움을 가만히 머금고 있는 조용한 문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파란 문. 그 문은 언제나 닫혀있었기에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기웃대기만 했던 파란 대문 집 담장 너머로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가곡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피아노 반주가 담장을 넘으면 내 입에서도 뜻 모를 가곡의 가사가 흥얼거려졌다. 그 이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굳게 닫혀있던 파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원에는 초록 식물들이 많았다. 난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랜드피아노를 보았다. 집주인은 생각나지 않지만, 함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던 건 떠오른다. 즐거웠다.



그랜드피아노를 쳐 본 후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을까? 이유도 모른 채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간 집에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이렇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얼마 뒤 집 근처 버스정류장 앞 '윤 피아노'학원으로 옮겨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다. 피아노가 세대 정도 있고, 가정집과 연결된 공간이었다. 양배추 인형처럼 뽀글이 파마를 한 피아노 선생님과의 인연은 4년 정도 이어졌다.



가만히 앉아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친다는 건 분명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지만, 때론 도망치고 싶기도 했었나 보다. 나는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 속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처럼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악보를 보았다. 선생님은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녀처럼 악보를 함께 보며 피아노 치는 기술을 알려주었다. 레슨 후 연습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열심히 연습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정집과 연결된 문을 열고 사라졌다. 피아노 치는 것이 지루해졌던 나는 몰래 도망을 쳤다. 집으로. 집에서 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피아노 선생님과 통화를 마친 엄마는 화내지도 않고 조용히 날 학원으로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니까 가능했던 일인 거 같아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 이후 난 성실히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학생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피아노가 치기 싫은 한 친구의 학원 탈출 대작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주 치밀했다. 먼저 죠스 바를 핥아먹으며 입술을 푸르스름하게 만들었다. 그다음 난롯가에 앉아 이마를 집중적으로 따뜻하게 했다. 드디어 연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저 아파요." 작고 떨리는 목소리에 선생님은 아이를 살피더니 피아노 수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 저런 방법이 있다니! '몇 년 전 난 탈출을 실패했었는데.'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탈출을 성공적으로 해 낸 친구에게 마음속 박수를 보냈다.



선생님은 그 상황을 정말 모르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귀여운 반항이었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친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한 후 선생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학원을 찾았다. 학원 이름만 같고 학원 선생님은 달랐다. 내 연락처를 남겨두고 올걸? 하는 후회에 그 이후 찾아가 봤지만,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나라 사교육 중에서 악기 수업을 떠올리면 단연코 1위가 '피아노'일 것이다. 피아노 레슨은 초등학교 입학 또는 입학 전부터 꾸준히 배우는 악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에 대한 추억을 많이 품고 있을 것이다. 50대에 접어든 르누아르는 프랑스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았다. 르누아르는 당시 프랑스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부강한 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의뢰인의 마음을 파악했다. 지금이야 피아노가 많이 보급되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르누아르는 부르주아 계층에서 이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피아노'를 작품에 등장시키며, 함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을 그렸다. 이렇게 탄생한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파스텔로 그린 작품 한 점과 유화 다섯 점 등 총 여섯 점의 대형 작품으로 완성되었고, 그중 의뢰인이 선택한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복숭아처럼 핑크빛이 도는 통통한 볼, 볼륨감이 느껴지는 헤어스타일, 아이들의 온화한 눈길 등은 우리의 마음까지 평화롭게 만드는 것 같다. 오로라처럼 은은하게 펼쳐진 배경과 따스한 주황의 피아노, 악보 위에 아즈라이 올라온 노랑빛은 아이들을 감싸주는 봄날 햇살 같다. 눈을 감아보자. 소녀들은 들려주는 따스함을 가득 머금은 피아노 선율이 들리는가? 그림과 음악이 함께 하며 예술은 언제나 곁에 있다고 알려주는 듯하다. 스마트폰 세상에서 눈을 떼고 세상을 둘러보면 좋겠다.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예술을 보고 느끼며 가을을 흠뻑 즐기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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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_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경 캔버스에 유채 | 116×90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_ 두 소녀의 초상, 1890-1892 캔버스에 유채 | 46.5x55xm | 오랑주리미술관 소장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_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1897년경 73x92cm | 오랑주리미술관 소장


#오랑주리-오르세미술관특별전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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