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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조용하게 건네는 온기

빌헬름 함메르쇠이(1864–1916)_ 햇빛이 드는 방, 1906

by 전애희

11월, 겨울준비

지난 13일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있었다. 친한 친구 아들이 수능을 보았기에, 수능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열리고, 눈길이 갔다. 수능 관련 기사를 훑어보는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 물결이 톡톡 튀는 젊음처럼” 이 문장이 수능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 생각하며 전체 글을 읽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했다. 안규례 시인의 시 ‘아침 산책’ 속 한 구절로 수능 응시생 필적 확인을 위한 문구였다.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시작된 필적 확인 문구는 문제지 표지에 기재돼 있다. 매년 수능 출제위원들이 논의를 통해 정해지는 필적 확인 문구의 조건이 흥미로웠다. 필적 확인이 목적인 만큼 문장의 구조와 활자 모양 등 작성자의 필적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담기면서 수험생에게 긍정적인 내용인지도 고려된다고 한다. 초긴장일 수험생들에게 짧지만 서정적인 글귀를 쓰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됐기를 바라보았다. 역대 수능 필적 확인 문구에 필사를 해보면 좋을 문장이 많았다. 그중 2015학년도 필적 확인 문구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이라는 문태준의 시 '돌의 배'의 한 구절이 좋았다. 햇살 뭉치? 따뜻한 보리차 찻잔을 양손으로 잡고 몸을 녹였던 날이 떠올랐다. 꽁꽁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그 순간 말이다.


수험생과 수험생 가족들의 마음이 추위를 알리듯 덜덜 떨리는 11월. 가지런히 놓인 숫자 ‘11’은 가을에서 겨울을 이어주는 길목이 되어 우리에게 ‘겨울’을 건넨다. 차가워진 공기는 상쾌함과 추위를 동시에 맛보게 하는 힘이 있다. ‘첫눈’을 기다리는 설렘을 안고 겨울맞이 준비를 했다. 미루고 미루던 패딩 점퍼를 꺼내 빨래를 했다. 건조기에 들어가 보송보송, 팡팡하게 잘 마른 패딩 점퍼를 보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남편은 추위를 잘 타는 아이와 손발이 차가운 나를 위해 핫팩과 충전식 손난로를 사 왔다. 친정엄마는 올해 수확한 햅쌀 다섯 가마니 정도면 되겠냐고 전화가 왔다. 여기저기 김장 소식도 들려왔다. 딸아이는 빼빼로데이라며 아침 일찍 편의점을 들려 친구를 위한 과자를 샀다. 친구들과 따뜻한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길게 늘어지다 서산으로 숨던 해가 점점 짧아지더니 우리 집 거실 창과 마주한 낮은 산 너머 높은 건물 뒤로 스르르 사라졌다. ‘엄마! 엄마!’ 호들갑스러운 딸 덕분에 웅장한 노을을 함께 감상하며 ‘빛의 여운’을 즐겼다.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_ 햇빛이 드는 방 (Interior with Sunlight on the Floor), 1906년 | 테이트 브리튼 소장

11월, 햇살

한낮 창을 통해 살금살금 들어오는 햇살의 따스함에 고양이 마냥 창가에서 잠시 쉬어본다. 어느새 난 햇빛 샤워 중. 나른해지는 몸속에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쓸쓸해 보이는 집 안에 따스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그림이 있다. 빌헬름 함메르쇠이(1864-1916)의 <햇빛이 드는 방, 1906> 작품이다. 빛이 들어오자 차가웠던 집안의 공기가 기지개를 켜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점점 따뜻해진다. 13년 전 이사를 위해 방문했던 텅 빈집이 떠올랐다. 작가도 그림 속 집을 처음 방문했던 날을 표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이 감도는 집에 이사 온 작가 가족들을 상상해 보았다. 문이 열리고, 간소한 살림살이와 손 때 묻은 가구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 식탁을 놓았다. 소박한 식사를 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들은 집안 곳곳에 스며들며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도 한낮 햇살 같은 포근함을 준다.


빌헬름 함메르쇠이_ A Room in the Artist's Home in Strandgade, Copenhagen, with the Artist's Wife, 1901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 1864–1916, 덴마크)_ 두 개의 촛불이 있는 실내 풍경, 1904


11월, 아침

빌헬름 함메르쇠이는 덴마크 화가로 코펜하겐 스트란가데 30번지(Standgade 30)에 위치한 집에서 살며, 집 안의 모습과 아내의 뒷모습을 주로 그렸다. 그만의 독특한 ‘그리자이유(Grisaille)’ 화법으로 표현된 그림은 회색조의 차분함과 깊이감이 매력이다. ‘그리자이유’는 회색조 색채만을 사용하여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화법이다. 무채색의 회색톤 속에서 빛은 더 큰 힘을 내는 듯하다. 햇살은 더 따스해지고, 촛불은 더 은은해졌다. <두 개의 촛불이 있는 실내 풍경> 작품 속 그가 살던 집에 세월이 소복이 자리 잡았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문에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지고, 문손잡이 주변에는 그들의 그림자가 겹겹이 쌓였다. 가족들의 발자국이 담긴 바닥, 소박한 커튼에도 세월이 묻어있다. 사용감 있는 식탁 위에 반짝이는 촛대 두 개 있다. 아직 집에 오지 못한 가족을 위한 그의 따뜻한 마음처럼 두 개의 초가 등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용하게 마음을 토닥이는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그림으로 11월의 일요일 아침을 열어보았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문장, 서로에게 건네는 말, 가족을 위한 서로의 마음, 친구를 위한 작은 선물. 가을과 겨울이 교차되는 11월, 고요한 햇살처럼 조용히 온기를 건네 보련다.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햇빛이 드는 방> 옆에 오지호 화가의 <남향집, 1939>을 가만히 놓아본다.





역대 수능 필적 확인 문구

정지용 시인의 시구가 가장 많이 쓰였고(2006·2007·2017학년도 총 3차례), 2006학년도에 쓰인 문구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은 2017학년도에 한 번 더 쓰였다.


2006학년도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정지용 '향수')

2007학년도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정지용 '향수')

2008학년도 :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윤동주 '소년')

2009학년도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윤동주 '별 헤는 밤')

2010학년도 :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2011학년도 :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정채봉 '첫마음')

2012학년도 :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황동규 '즐거운 편지')

2013학년도 :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정한모 '가을에')

2014학년도 :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박정만 '작은 연가')

2015학년도 :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문태준 '돌의 배')

2016학년도 :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주요한 '청년이여 노래하라')

2017학년도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정지용 '향수')

2018학년도 :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김영랑 '바다로 가자')

2019학년도 :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김남조 '편지')

2020학년도 :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박두진 '별밭에 누워')

2021학년도 :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2022학년도 :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이해인 '작은 노래2')

2023학년도 :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한용운 '나의 꿈')

2024학년도 :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양광모 '가장 넓은 길')

2025학년도 :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곽의영 '하나뿐인 예쁜 딸아')

2026학년도 : 초록 물결이 톡톡 튀는 젊음처럼(안규례 '아침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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