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자, 그리고 받는 자
Giver and Taker

그리고 호의 은행, 파울로 코엘료 - 오 자히르

by 최현규

다시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어보며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세이노를 윌라에서 검색하니 2권의 책이 더 있었다. 신이 나서 한 권을 그날 다 읽고, 그다음 권은 차에서 오디오로 출근시간에 들었다. 정확한 소설명은 기억이 안 나지만, 세이노는 어릴 때 어떤 소설책을 보았었고 그 책이 자신의 청년기의 삶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라는 책을 보면 "호의 은행"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호의은행은 언젠가 도움이 될 사람에게 인맥에서 비롯된 예금을 부여하고, 나중에 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인간관계를 말한다.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며, 무언가를 위해,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깔려있다.


내가 어릴 때, "오 자히르"의 "호의 은행"을 보고 주변인에게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예금을 부여하고, 받지 않아도 좋으니, 호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 성향에서 비롯된 생각일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이 놀던 친구에게 이기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말이 너무 싫어 그렇게 안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의 "호의 은행"이라는 개념을 며칠이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을 타인에게 줄 때, 이자도 안 받고 원금도 안 받으면 타인이 좋아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타인은 마음에 불편함이 있어서 나에게 잘해줄 거야 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했다. 이 호의 은행이라는 것이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던 것 같다.


내가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또는 지식 노동의 대가를 타인에게 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내 입장에서는 단순히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니 남에게 준다 하여도 이것은 없어지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고, 이것을 줌으로 인해서 받는 사람이 10이라는 노력을 1로서 줄일 수 있으면 그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회사를 다닐 땐, 타 부서에서 보고서나, 어떠한 양식 등을 요청하면 아무 대가 없이 수식이 다 기입된 엑셀파일을 전해주거나, 보고서를 그냥 써주곤 했다. 내 입장에서는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보고서야 내가 쓰면서 얻는 지식적 이득이 있고, 받는 사람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관점에서였다.


그러나, 요즘은 아니 최근 과거 5-10년간은 나도 좀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몇 건의 사례가 있다.


F&B회사에 재직할 때, 대형 정부과제를 기획했다. 연구할 사람들을 배치하여야 하는데, 주변에 친했던 교수님을 배치했다. 사업계획서는 100page 정도 되었고, 혼자 다 작성했다. 보통은 교수가 작성을 도 맡고 회사는 사업적인 측면만 작성하는 게 이 분야의 통념 같은 것인데 사업계획서를 혼자 쓰면 전체적인 어투나 문장의 구성, 그 뭐라 할까 톤이 일정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익숙함을 줄 것이다라는 생각과 더불어 상대 교수를 믿지 못하는 내 생각도 있었겠다. 못 믿는다는 게 못한다는 게 아니라, 내 기획의 의도를 정확히 싣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작성, 발표, 심사를 거쳐 그 과제는 총 연구비 9.8억을 받고 3년간 연구는 수행되었다.


위 교수의 친구가 K 모 국립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친구 교수는 연구비가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였다. 그러면서, 어떠한 특허가 있는데 그것을 기술이전 시켜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나는 제약회사에서 L/I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기술이 나쁘지 않고, 회사에도 도움이 되고 서로 좋을 것 같아서 팀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사, 상무, 사장을 설득해서 기술이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총금액은 4.3억이었는데 기술이전금액은 마일스톤 형태로 단계별로 지급이 되는 형태였고, 이 금액 때문에 K대 산학협력단 직원과 수차례 싸웠다. 제주도에서 만나서도 2시간을 실랑이했고 결국 기술 이전을 했다. 이후 이 기술의 개발을 위해서 역시 대형 정부과제를 기획했고, 해당 과제는 18.9억의 연구비를 수주받았다.


연구비를 땄으니 뭐라도 챙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9.8억의 과제가 내게 준 것은 연구소장의 무능함을 확인하고 퇴사를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고, 18.9억의 연구비의 결말은 기술이전과 계획서 작성에서 얻은 보람보다는 처음에는 모두 반대하던 사람들이 과제가 수주되자 모두 자신이 기여했다며 돌변하는 태도를 보며 인간이라는 것에 환멸감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

무언가 인생의 목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놓고 있던 연구를 다시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40대를 30대처럼 목표 없이 살다가는 그냥 흐르듯이 지나가버리고, 어느새 50대가 되어 지금 40대를 돌아볼 때 후회를 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40.png 40이라는 숫자 위로 남자는 걸어간다.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에서

그래서, 황당하겠지만 논문을 쓰고 싶었다. 강의도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위 교수에게 연락해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하고, 하고 싶은 게 있으니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도와주겠다. 나 또한 열심히 해보겠다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말 뿐이었다. 구태여 그 사유를 물어보았으나, 이유야 구구절절 많았지만 결론은 바쁘다는 것으로 일축되었다.


예전의 서운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왜 나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어라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론은 나에게 신경 쓸 만큼 내가 가치가 없던 것 같다.


몇 년 전 읽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책이 생각이 났고 왜 나는 기버 형태의 인간인지가 서러워졌다.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간적인 취급은 받고 싶었다. 그 교수와의 관계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컸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30대의 절반 정도 과제를 따고, 연구하던 시간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giver.png 기브 앤 테이크 서평 중에서 발췌


그러다, 위 서평을 보았다. 빨간색 표시한 부분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저런 형태의 인간부류가 정말 많았다. 제약회사에서는 실장이라는 아줌마가 저런 이야기를 했고, F&B회사는 연구소장이 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모두 나에게 실적을 요구했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다 해줬었다.


최근에 그 교수가 저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니는 교수 못한다", "니는 사업도 안 맞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후에 따져 물었다. 변명의 요지는 현재의 직장이 좋으니 그 직장에서 잘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는 의도로 이야기하였다고 하나 아직까지 이해는 되지 않는다.


여기서 2가지 관점이 혼재한다.


부정적 관점

"그 회사에 지내며, 교수가 재직하는 학교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줘", "넌 날 계속 도왔잖아"

"그러니, 다른데 가면 안 돼", "너는 내가 지배할 거야"


긍정적 관점

"교수도 사업도 안 맞으니 현재 회사가 맞아"


쥐어짜듯이 긍정적 관점을 썼는데, 이해가 안 된다. 나를 평가할 만큼의 연구실적이나, 사업성과가 있었는지 되묻고 싶어졌다. 그런 성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나에게 호의를 요청했을까?

애초에 나는 "호의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할 때, 받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지금 받고자 하는 게 문제라는 생각으로 귀결 됐다. 다시 내가 이기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커를 만난것일까? 10년이 넘게 그것을 모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교수는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것이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는 테이커를 만났다는 생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걸 알면 이런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답은 없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이태백의 시구가 멋있어서 써놓았다.
이태백의 시구 ‘장풍파랑회유시, 직괘운범제창해’
(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거센 바람이 물결 가르는 그때가 오면 구름 돛 달고 푸른 바다 헤치리라)

목표는 멀고 현실은 어렵다. 그렇지만 헤쳐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아직 돛을 펴고 헤치기엔 풍랑이 너무 강해 나의 돛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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