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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Mar 20. 2022

환자들은 왜 밤이면 응급실에 가게 될까?

완치를 꿈꾸던 아버님은 두 차례의 재발로 그 꿈이 사라지게 되었다. 재발이 확인될 때마다 실망이었지만,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주치의는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항암 치료제를 바꾸었다. 새로운 항암 치료를 앞둔 주말이었다. 아버님은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틀 전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아 방문한 s 병원 응급실에서는 단순 요로 감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항생제를 먹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보았던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은 5일 전이다. 그때만 해도 거실로 걸어 나와 의자에 앉아 애써 웃음을 지었던 아버님이다. 말로만 들어서는 아버님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다. 두 눈으로 환자를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과 의사인 나는 퇴근길에 아버님을 찾아뵈었다. 아버님은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아버님은 무기력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 기운이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아버님의 투병 기간 동안 집안에는 이런 분위기가, 위기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이런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의 천진난만한 딸아이였다. 아이의 순수함은 집안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밝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일부러 아이를 맡기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아이의 순수함마저 통하지 않았다. 집안에 어른이 여럿 있어도 정신없이 방치된 아이의 산발 머리로 봐서 내 추측이 옳았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괜찮다고 손을 올리던 아버님의 마지막 뒷 모습. 그때 나는 그때 아버님의 모습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불경한 생각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당장이라도 입원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퇴원한지 4시간 밖에 되지 않았었다. 지칠대로 지친 가족들은 주말은 집에서 보내고 예정된 월요일에 병원을 방문하자고 했다. 이번에는 내 직감이 틀리길 바랬다.  


주말 동안 아버님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기로 했다. 아버님은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기력은 없었지만, 어제 본 올림픽 야구 경기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의식은 명료했다. 양손과 발의 힘은 일관되어 박수를 쳐보라고 요청하면 곧잘 따라 하기도 했다.


오늘 밤만 잘 넘기기를 바랐다. 몇 시간 후면, 주치의 얼굴을 보고 아버님의 무기력의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밤중 전화벨이 울렸다. 오랜만이었다.


- 아버지, 아무래도 응급실 가셔야겠다. 머릿속으로 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하셔.


아무것도 모르던 인턴 시절, 나는 환자들은 왜 밤만 되면 응급실에 오는 건지 의문이었다. 낮에는 보다 많은 의료진이 포진해 있으니 좀 더 나은 진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늘 의료진이 부족한 밤에, 무엇보다 내가 당직을 서고 있는 이 한밤중에야 응급실에 오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이해가 쌓여가며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밤은 낮과는 다른 생체 리듬을 가진다. 24시간 생체 주기에 따라 변하는 호르몬이 있다. 대표적으로 '코르티솔'은 일종의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한 힘을 제공한다. 우리가 활동을 하는 낮에는 농도가 높고, 밤이 될수록 적게 분비된다. 밤에는 코르티솔의 농도가 떨어져 우리 몸의 면역 체계가 활발해진다. 질병에 대항한 결과로 밤이면 더 아프다. 또한 

낮 시간 동안의 부산함이 사라지고 기저에 깔렸던 질병이 본색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많은 이들을 예민하게 만드는 층간 소음 문제와 비슷하다. 낮 동안 위집의 발 망치 소리는 생활 소음에 묻혀 참을만하다가, 밤에는 잠 못 이루는 성가진 층간 소음이 된다. 낮동안의 소란함이 통증을 덮어 버린다.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니 무감각해진 통증을 밤이 되어 자각된 것이다. 그렇게 환자들은 밤에 더 아프다. 


아버님의 한밤중 응급실 행 소식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를 뜻하는 patient는 라틴어 patiens에서 온 말로 참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대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 아버님은 잘 참는 사람의 대표 주자로 '늘 괜찮다' 고 했다. 주말 내내 지켜보았지만, 어디가 불편하고 힘들다는 말씀은 물론이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염증 수치가 보통 사람의 40배가 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환자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이 그토록 잘 참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환자들이 밤에 응급실을 찾는 이유는 할 일 없이 밤의 고요를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고 참았다가 터진 시간이 하필 밤이었던 것이다. 하릴없이 선택된, 당사자도 보호자도 결코 원하지 않았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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