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그의 삶
10년 전만 해도 내가 근무하는 이 병원은 잘 나가던 K 의사의 소유였다. 그 의사가 이 병원을 떠나고 의사가 바뀐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럼에도 환자들은 여전히 이 병원에 오고, K 의사를 그리워한다. 떠나간 그 의사와 정반대인 지금의 젊은 여의사인 나를 보면서 그를 떠올린다. 이 병원을 방문하는 목적이 내가 아니라 K의사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 그 선생님. 사람 참 좋았어. 나랑 친구도 먹고 그랬다고. 그런데 그 선생님이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지."
" 이 약이 그때 그 선생님이 지어준 약인데, 나하고 참 잘 맞아. 몇십 년을 먹어도 속도 편해. "
직접 마주한 적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 그의 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생긴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된 이후 자신의 장애를 거울삼아 환자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불굴성과 진심에 감동했다. 환자들이 받은 감동은 금세 유명해졌다. 지역에서 유명해진 그는 사방으로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하나의 병원에는 의사 한 명만이 근무할 수 있기에 각 병원에는 신임 두터운 후배와 실력 있는 간호사들로 채웠다. 당시 근무하던 수간호사 대부분은 K 의사가 졸업한 대학병원 출신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일 잘하는 간호사를 개인 병원에서 근무시키는 것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얼마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렇게 서울에만 여러 개의 병원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개의 병원을 운영하던 중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능했지만 몸은 하나였던 그에게도 힘에 부치는 일들이었을 터. 결국 그는 병원을 정리하기로 결정한다. 한 의료재단에 그가 소유하고 있던 병원 모두를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곳이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바로 이 의료 재단이다. 이 재단에서 여러 해 근무한 나는 예상할 수 있다. 그 협상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일을 벌여놓을수록, 거둬야 할 것들이 많을수록. 뒤처리는 무거운 법이다. 모든 것이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힘에 부치는 어느 날 밤이었다. 모든 걸 참아왔을 그였지만, 가슴통증과 턱밑까지 차오르는 호흡 곤란만은 버틸 수가 없었다.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직접 경험하며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가쁜 호흡을 이끌며 도착한 곳은 그가 수련받았던 대학병원의 응급실. 모르긴 몰라도 그곳에서 그가 살렸던 환자가 수십 명은 되었을 것이다. 호흡곤란만 아니었다면, 한참 아래인 후배를 보며 반가운 마음에 진심 어린 조언 한두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곧바로 인공호흡기가 부착되었다. 한순간에 넋이 나간 심장은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수많은 환자를 살려왔던 그였지만. 자신에게만은 속수무책이었다. 사람 여럿 살린 유능한 의사도 자신에게 주어진 질병과 죽음의 운명은 피하지 못했다. 급성 심근 경색이었고, 정황상 과로가 유발 원인이었을 것이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병원의 주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병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환자들은 살아있지만, 그들의 의사는 죽었다. 10년이 지나도록 이 병원의 명백을 잇는 것은 병원을 세운 의사가 아닌, 살아남은 환자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던 의사가 죽었다고 하면 충격을 받는다. 건강에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의사는 늘 건강한 것만 골라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건강한 것들로만 삶을 채우기란 불가능하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의사도 사람이기에, 모든 걸 피할 수 없다.
K 의사의 인생을 짧았지만, 그를 추억하는 많은 환자들이 그의 삶을 길게 만들고 있다. 나 또한 그가 남긴 환자와 인연이 되어 그를 짐작하며 그가 환자에게 보여준 애정에 대해 배운다.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다. 어떻게 삶을 살고, 언제,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하는가라는. 아마도 그는 공부하고, 환자를 보고, 일을 하는 것에는 능숙했지만, 쉬는 건 서툴렀을 것이다. 내가 그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과도한 업무로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우, 하루도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을때, 가슴의 압박감과 두통이 해결되지 않을때.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몸에서 중요한 심장과 뇌는 결국 폭발하여 심근 경색, 뇌경색, 뇌출혈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달리기만 하고 멈추지 않는 자동차는 결국 고장 나기 마련이듯, 가끔은 멈추어야 한다. 평생 멈추지 않고 살아온 사람에게 쉼이란 의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 시간을 가지고, 반드시 자신의 건강을 확인해야 한다. 동시에 재삼재사 스스로에게 달리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에게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능력자의 삶이란 이토록 오랫동안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