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후회는 나만 하기를…
“ 지난달에 왔어야 했는데, 한 달이나 늦었네요. 약이 모자랐을 텐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
A는 고혈압, 당뇨병으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두 달 전. 그때 30일 치의 약을 처방했었다. 지난달에는 왔어야 했는데 한 달을 건너뛰었다. 덩달아 혈압과 혈당도 널뛰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혈압과 혈당이 높아진 건지, 약을 먹지 않아서 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나의 처방은 달라진다. 환자는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모든 걸 명확하게 한다. 약을 먹지 않고 지냈고, 높아진 혈압과 혈당은 그에 따른 결과였다.
진료실에서 A와 같은 불량 환자들은 많다. 반면, 처방받은 약을 잘 먹는 모범 환자는 적다. 약 잘 먹는 모범 환자는 갈채받아 마땅하다. 나는 진료실에서 A와 같은 불량 환자를 만나면 마음이 쓰인다. 그에게 가는 내 마음은 동병상련이다. 약 잘 먹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1년 전 이사를 앞두고 대대적인 집안 정리를 했다. 그곳에서 내가 먹지 않고 쌓아만 두었던 약을 발견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그대로였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더 이상은 먹지 못하게 된 약들로 산을 이루었다.
공부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해서 모범 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겹도록 약을 잘 먹지 않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 불량 환자였다. 교실의 불량아도 자신의 잘잘못을 안다. 그들에겐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리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도 약을 먹지 못하고 불량한 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의사가 아닌 환자가 되어. 입이 있어도 할 말 없는 그들을 대변해본다.
첫째. 약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의사가 된 지 한 달 만에 환자가 되어 매일 약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내게 먹고사는 일은 환자를 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이었다. 약 먹을 틈이 없었다. 병동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눈을 뜨면 밥을 먹어야 했고, 눈을 감으면 잠을 자야 했다.눈앞에는 당장 스러져가는 환자들이 있었다. 그 틈에 나를 위한 알약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모범 의사가 되기 위해 모범 환자 되는 것쯤은 포기해야 했다.
둘째. 가끔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병의 첫 진단만 충격이었다. 약을 먹고 몸이 좋아지자 나는 건강하다고 믿었다. 하루 이틀 약을 먹지 않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환자라는 사실 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그 믿음으로 나는 생각날 때만 약을 먹었고, 어느덧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아도 건강하다’라는 믿음은 모든 환자들에게 유효하다. 환자 스스로 의사가 되어 자가 진단하고 약의 중단 여부를 결정해 버린다. 의대 6년, 인턴, 레지던트 5년, 도합 10년이 넘는 의사의 경력보다 환자 스스로 겪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약 먹는 것이 불편했다. 내가 먹어야 하는 알약은 너무 컸다. 브라질너트보다 큰 알약을 한 번에 두 알씩 하루 두 번 먹어야 했다. 씹어 먹을 수도 없었다. 맛도 없는 알약을 삼킬 때마다 목에 턱턱 걸리고 헛구역질이 일어났다. 약 먹는 일은 불쾌한 일이었기에 피하고만 싶었다.
넷째. 약 먹는 것이 귀찮았다. 불현듯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 손에 약은 없었고, 약을 찾아야 하는 것이 귀찮았다. 전공의 숙소, 집을 오가다 보니 약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었다. 장롱 속에 넣어둔 귀찮은 일은 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약 먹는 것을 잊고 살았다.
이런 이유에 더해 나를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이런 일의 결과는 뻔하게도 질병의 재발이고 악화였다. 의사라고 예외는 없었다. 첫 발병 이후 5번의 재발에는 각각 사연이 더해졌지만, 약을 제때 먹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컸다.
수차례의 실패와 재발, 스스로에게 실망도 여러 번. 마지막 재발에서 더 이상은 쓸 약이 없다고 했다.
쓰레기통에 버린 건 젊은 날의 내 건강이었다.
약을 먹지 않았던 결과로 몸이 망가지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 몸이 되었다. 의사로서 매일 누군가에게 약을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만은 예외가 되길 바라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았으면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불성실했다.
모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데, 나는 어느새 불량 환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나를 감시하고 돌봤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약을 잘 먹는 것은 환자의 기본 태도고, 질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뜨거운 불구덩이에 손을 데고서야 뜨거운 줄 아는 인생이라지만. 내가 깨달았던 늦은 후회를 모두가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겹도록 환자에게 약 좀 잘 먹자고 잔소리한다.
우리 약 좀 잘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