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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Oct 11. 2021

의사는 하고 싶고 병원은 떠나고 싶고

100세 시대.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늘어난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수명도 길어졌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연령도 환자의 수명만큼 높아졌다. 법적으로 정년이 없는 의사는 원하는 날까지 출근할 수 있다. '평생 일할 수 있어서 좋겠다'라며 모두가 부러워한다. 원한다면 평생 일 할 수도 있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나는 한 달 중 월급 날인 25일과 퇴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직장인이다. 코로나 시대임에도 결코 재택근무가 허용되지 않는다. 병원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수십 년 전, 꿈이 꿈으로만 존재했던 시절.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의사가 되기로 했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태생. 의사의 모든 행위가 환자의 건강을 위하는 일이 되는 당연함에 반했었다. 그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 내 삶의 목표는 병원을 벗어나는 것이 되었다.


내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의사 면허증과 병원 때문이다. 


의사 가운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1년 전 선배가 의료 사고 재판 중 법정 구속되었다. 그는 아이 둘을 가진 워킹맘이다. 이틀 전까지도 대학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집에서는 어린아이를 돌봤을 선배. 하루아침에 차가운 바닥에서 지내게 된 선배와 선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공판 기일날 아이들에게 제대로 인사나 하고 나왔을지. 목이 메었다. 뉴스에서 한낱 이벤트로만 여기던 일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선배와 내 얼굴이 겹쳐졌다. 그때 선배는 그저 운이 없었던 것이고, 그동안 나는 억수로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의사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 의사에게 주어진 권한만큼 막중한 책임이 함께 따른다. 담장 위에서 어느 쪽으로 몸이 기울지 가늠할 수 없다. 평생 일할 수 있다는 의사 면허증은 한쪽 발목에 묶인 족쇄 같다. 족쇄의 무게로 나는 뛰지도 도망가지도 못한다. 함부로 족쇄를 풀 용기도 없다.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병원은 출구 없는 감옥이다. 3평 진료실. 이 공간에서 나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도 진정한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환자와의 갈등, 고성으로 방안이 가득이었을 때. 나는 숨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내가 숨을 수 있는 공간과 비상구는 없었다. 남몰래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창문뿐이었다. 창문으로 도망쳐 4층 높이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창문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건 비둘기였다. 구구라는 음성만을 내는 미물은 나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대로 왔다가 내키지 않으면 떠날 수 있는 비둘기. 진료실에서 오도 가지도 못하는 나. 누가 미물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평생 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장 이곳을 떠나가겠다고 하면 내가 아니라도 이 자리를 채울 의사는 많다. 다른 이들보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언젠가 병원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고 말 것이다. 병원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는데 병원을 떠난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진정 원하는 삶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라면, 반드시 진료실이라는 공간을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의 삶은 유지하고, 병원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원했다. 


의사는 하고 싶고 병원은 떠나고 싶었다.


병원을 벗어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나보다 앞선 선배, 동료들은 자신의 것을 만들고 있다. 자신만의 병원, 직원, 환자들. 어쩌면 자기 것이 있다면, 그 길이 더 쉬울 수도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진리에 가깝다. 


나도 그들처럼 내 병원 만들기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다. 나의 모든 시작에는 재발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봉직의가 아닌 오너로서의 삶의 시작에 또다시 재발의 어두움이 들이닥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배들이 자신의 병원을 세우는 것처럼 나도 나의 것을 만드는 중이다. 나는 내 병원, 내 환자, 내 직원은 없지만, 내 채널은 손에 넣게 되었다. 글을 쓰고, 블로그, 유튜브를 만들며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해 이야기한다. 3평 진료실의 공간에서 벗어난 넓은 세계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해 잔소리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비대면 진료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의 목적은 방 안에서 인터넷으로만 검색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병원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용기를 주고 싶다.    


의사라는 직업은 유지되고, 병원은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지 모른다. 


이곳은 지금 일하는 진료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나를 위협하는 눈빛도, 시간 제약도 없다. 누구든지 원한다면 24시간 언제든 내 목소리와 글을 만날 수 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온라인이라는 곳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의사로서의 삶을 평생 죽을 때까지 하며 살고 싶다. 애정을 담아 글을 쓰고 제작한 영상을 제작을 온라인으로 송출한다. 진지하고 재미없는 글과 영상들이 당장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기를. 나의 진심이, 이 메시지가 누군가에겐 닿기를. 내 글과 목소리가 누군가의 건강에 실 같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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