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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Oct 03. 2021

여의사의 새벽 5시

어쩌다 보니 미라클 모닝?

새벽에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 나의 새벽 기상은 내가 원하는 기상 형태가 결코 아니다. 나는 잠이 많은 사람이다. 기상 시간은 늘 마지노선이었다. 적어도 그 시간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했다. 겨우 눈곱만 떼고 출발해야 지각을 면할 정도로 기상 시간은 늘 아슬아슬했다. 학생 때 시험 기간에는 머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시험 기간에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나의 새벽 기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했다.


전공의 시절 나의 새벽은 환자를 위한 시간이었다. 10년 전 오늘도 역시 나는 새벽 5시에 깨어있었다. 당직 의사의 밤 시간은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 시절 새벽은 하루 중 가장 긴장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밤만 되면 환자들에게는 문제가 생겼다. 교수님들과의 아침 회진을 앞두고 나는 병동 주치의로서 지난밤 나의 환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찰했다. 가령 밤새 열이 몇 번이나 났는지, 열이 난 내 환자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 확인한다. 어제 시행했던 검사 결과를 되짚고 아침의 혈액검사를 눈에 바른다. 중요한 결과들은 환자 차트에 적어둔다. 이 새벽에 가장 똥줄이 탔던 것은 고년 차 선배들의 전화였다. 그들의 전화는 당직의사로서의 나의 행위를 추궁하기 위함이었다. 새벽 5시. 전화가 울렸다. '왜 그랬어?' 지난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더듬어보며, 그들의 샤우팅을 감당했다.


전공의 고년 차 (치프)가 되자, 당직 서는 날이 줄어들었지만 책임감은 더해졌다. 환자가 좋지 않을 때는 밤새 환자의 전화를 받으며 새벽을 맞이했다. 새벽의 끝엔 밤새 내 환자를 돌봤지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당직의사를 다그쳤다. 새벽 5시. 전화를 건다. '왜 그랬어?' 저년 차 당직의사로서 내가 받았던 전화를 나도 하고 다녔다. 새벽부터 이어진 나의 하루 시작은 아침 7시경 교수님들과의 회진으로 마무리되었다.


엄마가 된 이후로 새벽은 아기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새벽 5시. 전공의 때 내가 회진 준비를 하던 그 시간이다. 아기는 새벽이면 잠에서 깨어 울어 젖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분유를 타서 먹이거나 밤새 축축해진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 새벽을 지나 날이 밝아오면 엄마의 삶이 마무리되고 의사로의 삶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 5시. 아기는 울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의 모든 감각은 새벽 5시에 맞춰져 있었으므로. ‘왜 깨서 나를 찾지 않는 거지?’ 잠에서 깨어 아기의 코에 손을 대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의 생체리듬은 새벽 기상으로 고정되었는데, 아기만 커버렸다.


새벽 5시가 되었지만 나를 찾는 환자도, 아기도 없었다.

 

아기가 잠들어 있는 안방 문을 살며시 닫고 거실로 나왔다. 아기가 깨어 나를 찾으면 꼼짝없이 내 시간은 사라진다. 언제 뺏길지 모르는 이 시간에 나는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것을 하고 싶었다. 운동이었다. 날씬한 몸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싶었다. 1분 대기조 엄마의 삶이기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작은방에 깔린 놀이 매트 위에서 홈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나를 찾을 때까지.


매일매일. 날이 밝아 집안의 누군가가 깨어나기 전까지 운동은 계속되었다. 가끔씩 아기는 깨어 나를 찾기도 했다. 마침 운동이 힘들어지려 할 때였다. 아이 옆에 누워 숨을 고르면서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보았다. ‘엄마를 찾아주어 고맙구나. 아가야.’


10년 전부터 시작된 새벽 5시 기상. 그 시작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환자를 위한 마음 불편한 시간이었고, 엄마가 된 이후에는 아기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내게 시간이 많았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출근하기 전 새벽잠이 얼마나 달콤하고 찐한데. 그걸 포기 할리가. 하지만 내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아껴 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새벽 5시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 나를 찾는 이는 없다. 하루 24시간 중 이때만큼은 엄마, 아내, 의사로서의 삶은 없다. 오직 나를 위한 시간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새벽 기상이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운동만 하던 시간에 이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추가되었다. 두 시간씩 운동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찾아본 곁눈질이었다. 매트 위에서 푸닥거리하며 땀 흘리는 운동보다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책장을 넘기는 것이 더 쉬웠다. 독서를 하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졌다. 독서, 글쓰기는 내 인생이 바꿔놓았다. 1년 전부터는 유튜브 영상 제작도 추가되었다. 그렇게 블로그에는 500여 편의 글이, 유튜브에는 50여 편의 영상이 쌓였다.


새벽 5시는 비효율적인 삶을 살아왔던 내 삶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하루 종일 해도 끝나지 않을 일들이 새벽에는 금세 마무리되는 기적을 가져다주었다. 물만 먹고도 카페인을 먹은 것처럼. 손가락에 모터를 장착한 것처럼. 높아진 효율로 괜찮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난 몇 달간 붙잡아 놓았던 지루한 이 글을 이렇게나마 끝맺을 수 있었던 건 오늘의 새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을 기다린다. 저녁 9시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아이를 재운다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이른 취침이다. 잠의 절대적인 양은 포기할 수 없으므로 새벽을 얻은 대신 불타는 밤은 버렸다.


내일의 새벽은 내게 꿈이다. 새벽이, 꿈꾸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일이면 알람 없이 5시 기상이 시작될 것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 새벽에 나는 일어나 꿈을 꾼다. 내 세상을 꿈꾸기 위한 본능적인 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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