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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Oct 24. 2021

나는 불량 환자였다

첫 발병 이후 수차례의 재발에는 각각 사연이 있었다. 공통적으로 모든 재발에는 잠 못 자고 잘 못 먹는 일상과 많은 순간 잘해야겠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나의 모든 재발의 근본적인 원인을 얼마 전 집에서 발견했다. 1년 전 이사를 앞두고 대대적인 집안 정리를 했는데, 그곳에서 내가 먹지 않고 쌓아만 두었던 약을 발견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그대로였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더 이상은 먹지 못하게 된 채로 산을 이루었다. 모든 재발의 기저에는 약을 제때 먹지 않았던 내가 있었다. 재발할 때마다 교수님은 약을 잘 먹었냐고 물었고, 나는 나름대로 잘 먹은 것 같았기에 그렇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복약 순응도에 있어서 적당히 먹어도 되는 약은 없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공부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해서 모범 환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약을 잘 먹지 않는 수많은 환자. 불량 환자 중 하나였다. 약을 먹지 못하고 불량한 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첫째. 먹고사는 일이 바빠 약 먹을 시간이 없었다. 인턴, 전공의 수련기간 내내 나는 시간이 없었다. 매일 약을 먹어야 했지만, 당장 눈앞의 환자가 스러지고 있었다. 나를 위한 알약 따위는 생각할 틈 없었다. 모범 의사가 되기 위해 모범 환자 되는 것쯤은 포기해야 했다.


둘째. 가끔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약을 먹고 몸이 좋아지자 나는 건강하다고 믿었다. 하루 이틀 약을 먹지 않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환자라는 사실 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그 믿음으로 나는 생각날 때만 약을 먹었고, 어느덧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셋째. 약 먹는 것이 불편했다. 내가 먹어야 하는 알약은 너무 컸다. 브라질너트보다 큰 알약을 한 번에 두 알씩 하루 두 번 먹어야 했다. 씹어먹을 수도 없었다. 맛도 없는 알약을 삼킬 때마다 목에 턱턱 걸리고 헛구역질이 일어났다. 약 먹는 일은 불쾌한 일이었기에 피하고만 싶었다.


넷째. 약 먹는 것이 귀찮았다. 불현듯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 손에 약은 없었고, 약을 찾아야 하는 것이 귀찮았다. 전공의 숙소, 집을 오가다 보니 약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었다. 장롱 속에 넣어둔 귀찮은 일은 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약 먹는 것을 잊고 살았다.


이런 이유에 더해 나를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이런 일의 결과는 뻔하게도 질병의 재발이고 악화였다. 의사라고 예외는 없었다. 첫 발병 이후 5번의 재발에는 각각 사연이 더해졌지만, 약을 제때 먹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컸다. 수차례의 실패와 재발, 스스로에게 실망도 여러 번이었다.


약을 먹지 않았던 결과로 몸이 망가지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 몸이 되었다. 의사로서 매일 누군가에게 약을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만은 예외가 되길 바라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았으면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불성실했다. 모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데, 어느새 불량 환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나를 감시하고 돌봤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약을 잘 먹는 것은 환자의 기본 태도고, 질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뜨거운 불구덩이에 손을 데고서야 뜨거운 줄 아는 인생이라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쓰레기통에 버린 건 알약이 아니라 젊은 날의 내 건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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