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내과 정기 진료 날이다. 오전에는 근무하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오후에는 환자가 되어 이곳에 왔다. 내가 인턴으로 근무했고, 내 병의 진원지였던 이곳.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병원은 변한 게 하나 없다. 푸르른 청춘들도 그대로다. 파란 스크럽 복에 가운을 걸치고 다니는 인턴과 전공의들의 얼굴을 보며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허옇게 뜬 얼굴. 까만 안경. 하나로 졸라맨 까만 머리. 말린 어깨. 종종걸음.
낯선 얼굴만 제외하고 모두 여전하다. 13년 전 이 병원에서 젊음을 불태우던 청춘들은 다 어디 갔을까? 내가 이곳에서 사라져 또 다른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것처럼 다들 어딘가에서 열심히 환자를 보고 있겠지. 오늘 내가 나의 환자들의 안위를 살폈던 것처럼.
처음 진단받았던 소화기내과 5번 방 앞에 섰다. 대기하던 의자도 변함이 없다. 이제는 온전히 환자로서 이 병원을 내원한 것이지만, 여전히 대기실 의자에 내가 앉을자리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원에는 아픈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진료실의 교수님도 그대로 동안으로 남아 계시는데, 변한 건 나뿐이다. 나만 아줌마가 되었고, 늙어 버렸다. 다음번엔 대장 내시경을 받아야 한다. 3년 간격으로 진행되는 이 대장 내시경은 할 때마다 매번 하기 싫고, 적응이 안 된다.
3년 전 대장 내시경을 받을 때는 두 살배기 어린 딸과 딸을 돌보는 친정 엄마와 함께였다. 진정 수면이 필요한 검사라 보호자를 동반해야 했는데, 그들은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나의 보호자들이었다. 내시경 실의 먼발치에서 친정엄마는 아기 띠에 아기를 안고서 서성였다. 그들은 내 검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를 마치고 아기를 건네받으며 안녕하고 눈 맞추고, 다시 엄마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안도했다.
마지막 재발은 5년 전. 출산 직후였다. 엄마가 된 지 한 달째. 엄마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선에서 나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그 질병이었다. 난생처음 가져본 나의 보물,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없던 나날들 속에 몸은 영락없이 신호를 보내왔다. 6년 동안 1-2년 간격으로 재발. 그때마다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로 급한 불을 꺼왔었다. 지난번 진료에서 다음 재발에는 쓸 약이 없다고 했다. 고전적인 스테로이드 대신 새로운 약을 쓰게 된다면, 더 자주 병원을 방문해야 하고, 더 많은 불편함이 수반될 것이 뻔했다.
전공의 때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엄마가 된 후에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재발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모두 내 건강은 후 순위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랐다. 원래 사용하던 약, 스테로이드로 잠재워지길. 교수님이 한 번 더 그 약을 처방해 주길.
예정되어 있던 진료를 앞당겼다. 초조했던 나와는 달리 교수님은 안정적이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교수님은 임신 중에는 아기가 엄마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는데, 출산 후 그 효과가 사라지면 질병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쓰던 약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여러 번 먹어 익숙했던 스테로이드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스테로이드 투여와 함께 밤낮 울던 아기가 50일 만에 통잠을 자기 시작하면서 내 몸도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남들은 100일의 기적을 바랐지만, 나에겐 50일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어쩌면 아기는 본능적으로 제 엄마 몸이 아프다는 걸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임신 기간 중에도 엄마 뱃속에서 무탈하게 있어 주고, 엄마의 질병 경과에 엄마를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다주더니, 이렇게 아기는 또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은 아프고 싶지 않았다. 이 작은 아이가 환자 노릇 못하던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의사지만, 환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 적절한 운동, 충분한 휴식, 처방한 약 잘 먹기, 정기적인 외래 방문과 검사. 특별할 것 없는 환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하나 쉽게 얻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당연한 것 역시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재발이길, 제발.
마지막 재발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닐 때 더 철저한 사람이 된다. 여전히 타인을 위한 일을 할 때 시간을 더 쓰고 힘이 난다. 나의 건강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를 돌보지 않으면, 내 아이도 내 환자도 보살필 수 없다. 이제야 나는 나를 보살피는 일을 허투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가족, 나의 환자를 위한 일이기에 더욱더 확실하게 지켜내야 한다. 나의 건강을. 그들을 위해, 동시에 나를 위해. 마지막 재발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이었다.
엄마가 된 후 마지막 재발. 그 이후로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질병은 재발 없이 안정기에 들어섰다. 매일 약을 먹으며 질병을 다스린다. 휴화산이 된 질병의 휴식기는 내 아이의 나이와 같다. 아이는 쑥쑥 커서 나를 떠나고, 그 질병은 내 안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