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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Jan 30. 2021

야! 나두 을이야

모든 의사가 갑은 아니다.

의사는 절대 갑이 될 수 없다. 

" 저 이렇게 받고는 일 못해요." 


오늘은 그들이 갑이다. 병원 직원들이 연봉협상을 했다. 연봉 협상 테이블의 당사자는 이 병원에서 나를 뺀 직원 모두다. 1년 중 오늘만큼 그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간다. 병원에서는 혹시라도 이들이 그만둘까 봐 전전긍긍이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은 그들이 부럽다. 연봉 올려달라고 이렇게는 '못한다'라고 말하는 그들이 멋지다. '못한다는 말' 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하겠다는 애들이 내 뒤에 백만 명쯤 서있다. 


의사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의사의 삶은 다양하다. 대형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그 병원에서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 봉직 의사, 구멍가게 같은 작은 의원의 주인 의사. 그 모든 의사의 처지가 같을 수 없다. 



나는 병원에서 매달 월급을 받는 의사다. 월급쟁이 봉직 의사는 을인 경우가 많다. 병원에서 우리는 으레 해고되어도 괜찮은 존재들이다. 올해는 유난히 일자리가 없다. 코로나 때문인가. 아니면 내과 3년, 4년 차가 한꺼번에 나와서인가. 아니다. 해마다 나오는 탄식이다. 특히 1년 중 3월은 의사의 몸값이 가장 떨어지는 때이다. 갓 보드를 딴 의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젊음으로 무장한 갓 보드들은 작년보다 조금 떨어진 연봉에도 기꺼이 일한다. 내가 첫 직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직원들이 매해 겨울이면 하는 연봉 협상을 해본 적 없다. 연봉 협상은커녕, 지금의 환자수를 유지하지 못하면 내 연봉은 깎이게 되어있다. 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의사 친구 J는 비자발적으로 퇴사한 지 수개월째고, 최근에는 M의 월급이 감봉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P는 종합병에 입사한 지 열 달째지만, 제때에 월급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제일 속상했던건 H의 이야기다. H는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내과 과장이다. 그 병원은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아침에 병원장을 비롯해 전체 과장 회의를 한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각각의 임상과 마다 매출을 확인하고 전달의 매출을 비교한다. 매출이 눈에 띄게 높은 과와 그렇지 못한 과는 이미 몸값에서부터 차이가 있는데도, 매달 비교를 당한다. 의과 대학생 때도 성적표 가지고 비교당하지 않았는데, 의사가 되어 매출로 비교를 당한다.


어느 직장이나 실적 압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병원에서의 실적 압박은 다른 직장에서의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가끔은 호객 행위라도 해서 환자를 끌어와야 하는 생각도 든다. 기다란 풍선 인형탈을 쓰고, "잘해드릴게, 저한테 진료받으러 오세요."라는 아이디어를 내본다.


그들을 떠올리며 연봉 협상은 굳이 안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매달 25 일면 따박따박 월급을 주는 여기에서, 나는 적어도 돈 문제로 치사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돈 벌려고 의사 한 거 아니다'라는 내 소신을 지킬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금의 내 직장이 제일 괜찮아 보인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곳에 충성하고 있다. 친구들도 이 자리를 꼭 붙들고 있으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월급쟁이 의사 하기 싫으면 '병원을 차려'라고 말한다. 회사 다니는 게 힘들다는 직장인에게 '그렇게 힘들면, 직장 때려치우고 회사를 차려.'라는 말과 똑같다. 위로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그건 직장인 의사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환자를 진료하는 것과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다르다. 병원을 운영한다는 건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이다. 공부하고 환자 진찰하는 건 학교에서 배웠지만, 병원을 차리고 운영하는 걸 배운 적은 없다. 


무엇보다 요즘에는 뭐든 규모의 경쟁이 먹히는 시대다. 크게 하지 않으면 인건비 조차 건질 게 없다. 작은 의원에는 원장이 병원 화장실 막힌 변기까지 수리해야 하는 실정이다. 물려받을 병원이 있는 사람과 무리한 대출을 끌어 작은 구멍가게라도 시도해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의사들 사이에서도 상위 1%는 있다. 그들은 우리와 격이 다르다. 그들은 정말 그야말로 상위 1%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의사의 삶이라면 화려한 유명인의 삶 만을 떠올린다. 화면에 보이는 그들의 삶이 의사들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들은 의사의 삶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될 수 없다. 



갑과 을을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삶은 같은 무대에서 매번 배역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 모두 어떤 때는 갑이 되고, 또 어떤 때는 을이 된다.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 의사가 갑일지 몰라도 그 의사는 동시에 또 다른 곳에서 을이 되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병원으로부터 월급 받는 봉직의사는 병원의 또 다른 을이다. 


오늘의 갑이 내일엔 을이 되기도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루아침에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어제 갑이었던 의사가 을이 되고, 환자가 갑이 되기도 한다. 나는 당신의 본 의사의 갑질만큼이나 환자의 갑질도 많이 봤다.    


의사는 모두 절대 갑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을 중 하나다. 우리를 오해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 야! 사실 나두 을이야."


연봉 협상의 시즌이다. 세상의 수많은 을들이 이번 연봉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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