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키드니 Feb 13. 2022

행주 나루터 - 땅의 끝자락에서

폐의 덩어리가 암이 맞다면, 더 이상 아버님과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확실했다. 의학 영역에서 확신이란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한다. 1년 뒤 혹은 2년 뒤에는 아버님이 우리 곁에 살아있을 확률이 희박했다. 앞으로는 좋은 곳을 함께 하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지 못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좋은 곳을 가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어야 했다. 


S 병원으로의 입원을 앞두고 경치가 좋다는 행주대교 근처 장어집에서 온 가족이 모였다. 우한 발 정체 모를 폐렴으로 뒤숭숭한 때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9명이 모인 자리에서 평소 같았으면 모두들 떠들썩했겠지만,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장어가 얼마나 고급 진 음식인 줄 모르는 4살 딸아이만 투덜거릴 뿐이었다. 우리는 숨죽여 입맛 없다는 아버님의 젓가락이 어떤 음식을 향하는지 지켜보았다. 장어를 포함하여 연근조림, 우엉 볶음, 김 무침, 해파리냉채, 젓갈류 등 갖가지 반찬으로 푸짐한 식탁이었지만, 아버님의 젓가락은 갈 곳을 잃은 채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성이 난 어머님은 직접 쌈을 만들어 아버님 입으로 가져갔다. 어머님의 성화에 못 이겨 공기 밥의 절반이 소진되었다. 몇 입 더 먹기를 바랐지만, 아버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한강을 옆에 낀 행주나루를 산책했다. 음식점을 찾는 이들의 방문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이곳 행주 나루는 행주대교가 없던 시절 한강의 이북과 이남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과거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에서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강의 북쪽으로 부모를 만나기 위해 혹은 일산장과 부평장으로 가기 위해. 


강은 잔잔하고 땅은 평평했다. 땅만 보면 일단 뛰고 보는 딸아이는 사촌 언니들과 함께 저 멀리 갈대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연날리기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껏 느려진 아버님의 발걸음에 맞추었다. 

"아버님, 저기 아이들 있는 데까지만 함께 가요. 천천히 가셔도 돼요." 


아직 어린아이들. 크는 것 조금 더 보고 가주세요 라는 뜻이기도 했다. 잔잔한 강가를 걷는 가족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겠지만, 실은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행주 나루를 비롯한 세상 모든 나루는 땅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길이 끊어지는 자리에서 나루는 만들어진다. 하지만 길이 끊어졌다고 해서 그곳에서 길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길의 끝에는 강이 있고, 사람들은 강을 따라 어디로든 이동한다. 나루에서 다른 나루로.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길의 끝에서 또 다른 길로, 삶이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땅의 끝 나루에서 강을 건너려 한다. 우리 모두 나루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각자의 나루에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전에 없던 삶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자의 삶. 환자 가족으로서의 삶이었다. 종국엔 그가 없는 삶일 것이다. 


떠나는 사람들만 지켜보았던 내가 이제는 나루터의 주요 손님이 되어 있었다. 

이전 03화 그때 왜 폐암을 발견해 내지 못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