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 (30)
몇 년 사이 정신과 의원을 방문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20, 30대의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상당수는 ‘번아웃 증후군’ 때문입니다. ‘번아웃 증후군’은 갑작스러운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동반하는 현대의 병리적 증후군을 말합니다. ‘번아웃’이 온 사람들은 충분한 휴식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번아웃’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기전에 의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 결국 회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무기력감을 유지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학습된 무기력’은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에 의해 1967년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실험에서는 세 개 집단의 개를 비교하였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일정 기간 장비에 묶어두었다가 풀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임의의 시간에 전기 충격을 주되, 개가 레버를 누르면 충격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레버가 없어서 임의로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세 그룹의 개들을 전기 충격이 있는 칸과 없는 칸으로 나뉜 박스에 넣었습니다. 이때 첫 번째, 두 번째 그룹의 개들은 전기 충격을 피해 옆 칸으로 건너간 반면, 세 번째 그룹의 개들은 칸막이를 넘어가지 못하고 전기 충격을 계속 받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극에 무기력을 학습하여 이를 극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회사 생활, 변하지 않는 경제 상황, 바뀌지 않는 상하관계, 해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노출되어 ‘번아웃 증후군’이 생긴 사람은 전기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 번째 그룹의 개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인간은 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지만, 일부분은 그저 똑같은 포유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과 개 모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셀리그만의 실험에서 무기력한 세 번째 그룹의 개들의 발을 직접 전기 충격이 없는 칸으로 넘겨주는 등의 행동을 몇 번 반복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즉,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면 무기력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변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학습된 무기력’에서 비롯한 ‘번아웃’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은 쉽지만, 내 주위 상황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장 급여가 오르거나, 진급을 하거나, 대출이 없어지거나, 대인관계가 좋아지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상황을 회피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학습된 무기력’을 겪는 많은 사람은 ‘해야 한다’와 ‘하면 좋다’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면 좋은 것’에 파묻혀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면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삼시 세끼를 잘 챙겨 먹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 잠을 잘 자는 것,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것 등은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누구보다 빨리 진급하는 것, 남들보다 더 돈을 많이 버는 것,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해외여행을 가는 것, 남의 눈에 중요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은 ‘하면 좋은 것’입니다. 물론 적당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면 좋은 것’들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은 어느 정도 충족이 가능한 반면, ‘하면 좋은 것’은 끝이 없습니다. 충족되지 않는 욕심은 ‘학습된 무기력’과 ‘번아웃’으로 이어집니다.
‘학습된 무기력’의 무서운 점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할 수 없다’는 죄책감은 스스로를 ‘할 수 없는 인간’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중요한 ‘해야 할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번아웃 증후군’이 온 사람들에게 약을 먹는 등의 치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꼭 ‘해야 할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공의 사회적 틀에 갇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요소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단순하지만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하면 좋은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이 채워진다면 ‘하면 좋은 것’도 더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번아웃’이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전기 충격이 없는 다음 칸으로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