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2021)에 따르면 첫 자녀 출산 연령이 32세 정도이다. 경력년차가 5년 전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라, 한 전문성을 갖고 10년 정도 경력을 쌓으면 전문가라고 보는 관점이 보편적이다. 요즘은 직급체계가 수평화 되고 있지만 보통 기업에서 중간관리자급의 지위에 오르는데는 보통 5-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이런 사실을을 종합해보면, 처음 일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경력의 초,중기에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일을 배워가며 성과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일에 몰입해서 열심히 도전하고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한창 일하고 배워야 할 경력의 초기, 혹은 중기에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경험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짧게는 출산휴가 3개월, 길게는 육아휴직 3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일에 한창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고, 가장 활발하게 일해야 하는 때에 신체적 변화를 겪어내고 물리적으로 일과 떨어져야 한다는 건 몸도 마음도 불편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일에서도 육아에서도 요구가 많은 시기가 이렇게 겹친다. 많은 여성들이 경력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느낄만 하다.
일하는 엄마들의 고충이 물리적인 육아(돌봄) 노동에만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흔히, '육아'를 아이를 재우고 먹이고 씻기고 (좀 더 크면 공부시키는) 활동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물리적인 노동량에 따른 시간과 체력의 압박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도 잘하면서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요즘 엄마들의 욕구가 강하다는 사실도 다뤄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그냥 키우는 게 아니라 '잘' 키우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것은 과잉적 모성을 생산할 위험을 내포하지만, 경쟁사회에서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가치를 내면화하며 성장해온 세대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기도 하다. 마침, 접근가능한 육아 지침과 정보들이 넘쳐난다. '좋은 엄마'에 대한 이상향이 쏟아지고 그 속에서 방황하기 쉬운게 현실이다.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활동에 오만가지 정보가 동원되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의 목록이 끝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신노동에는 아이의 기본적인 생존과 안전을 지키는 것 외의 '정서적 돌봄'에 대한 고민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유아기는 물리적으로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정서적인 토대가 만들어지는 민감한 시기임이 분명하다. 아이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정서적인 유대를 쌓음으로써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요즘 부모들에게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의지적으로 갖게 되는 미션이다. ‘사실 일이 방해’라고 할 정도로, 아무리 일은 한다고 해도 아이의 정서적 애정결핍을 초래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되고 나면 머릿속이 얼마나 치열해지고 복잡해지는지, 소요되는 에너지의 양을 시간으로 환산하기도 어렵다. 형식적이지 않고 매우 추상적인 과정이고, 개인마다 그 역동도 다르다. 그래서 그 무게를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에 대한 마음과 아이에 대한 마음은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이 작아지는 식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에게는 일에 대한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에 대한 마음을 담는 주머니가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애정을 갖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전혀 다른 성격의 대상이 추가되는 것.
그런데 시간과 체력이라는 물리적 자원이 두 배로 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
한정된 에너지는 두 활동에서 분산될 수밖에 없다.
자녀라는 특별한 존재는 마땅히 내 삶의 일부를 내어줄 만한 존재이다. 삶의 정서적 토대가 형성되는 영유아기의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지켜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일시적'으로 우리 마음의 우선순위를 아이에 두고, 내 물리적 자원을 집중시킨 후 때가 되면 다시 일에 몰입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내심이 약하다.
인생에서 이렇게 중대하고도 새로운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꿀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아이보다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체력을 투입하며 최대한 경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그 유명한 심리학의 '역할 갈등'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갈등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모자란 시간과 체력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간과 체력을 안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잠시 아이를 위해서 (아니, 아이와 나의 관계를 위해서)
딱 1년만 하루에 4시간 일하고 싶은데..
딱 3년만 쉬고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데..
딱 3년만 출퇴근 시간만이라도 조율하고 싶은데...
그 선택이 자초할 손실이 어떠한지 수많은 사례들과 선배들을 통해 보아 왔기 때문에, 마음은 아이에게 있지만 몸은 사무실에 나가있게 된다.
(혹은, 반대의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방해받기 싫은데...
딱 이 프로젝트는 집중해서 잘 마무리하고 싶은데...
사실은 일을 지키기로 결심한 여성들에게 이런 어려움이 더 강할 것이라는 오해를 했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는 반대의 마음들, 아이와의 관계도 지키고 싶은 마음들이 드러났다.
미시적으로 보면 일에 대한 몰입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지만,
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거시적인 과정에서 경력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어떤 경우이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자원을 원하는 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게 여성이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결국, 여성들은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도, 안정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자녀를 잘 키우는 것도 모두 가치롭고 소중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 두 가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각자 다른 의미와 중요도를 갖는다.
다만, 한정된 자원을 원하는 대로 조율할 수 없는 환경적인 맥락 때문에 통제력을 잃고 정체성의 방황기를 겪을 뿐이다. (칼퇴근은 가능하지만 승진은 포기해야 하는...) 만약 집중육아의 시기에 일의 속도를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꾸역꾸역 사회적 가면을 쓰고 애써 괜찮은 척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내 아이의, 내 가족의 속도가 아닌 세상의 속도에 맞춰서 일 해야 한다.
자아분열은, 육아 때문에 잠시 서행해야 하는 시기를 직장에 허락해주지 않을 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