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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mom Sep 23. 2022

'완벽한 계획'은 완벽하지 않다

일과 육아는 통제불능이기 때문

성경에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내용의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아무리 어떤 좋은 계획을 갖고 있어도 신의 허락이 있어야 하나보다.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다. 엄마노릇의 과정은 특히 더욱 그러하다.


자기 일을 하던 여성들은 임신과 동시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MBTI가 어떤 유형이든, 누구든지 대부분 '계획' 모드에 돌입한다.

일과 육아를 어떻게 병행할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철저히 계획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계획한 대로만 된다면 할만한 게임이다.'

혼자 화이팅을 외치며 멋진 워킹맘의 일상을 그려본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생각지도 못한 여러 가지 변수들로 정신이 쏙 빠진다.

왜 그럴까? 

우선은 출산을 하면 모성인 건지 욕심인 건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에게 마음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일도 육아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도전, 나는 할 수 있다: 일과 육아의 경계 만들기


이제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를 사용하는 비율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2021년도에 임금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일-생활 균형 제도의 이용 용이성을 보고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 중 출산전후휴가(배우자 출산휴가 포함) 제도를 남녀 모두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59.9%,  육아휴직제도를 남녀 모두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53.6%, 여성만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6.6%이다. 


출산휴가, 혹은 육아휴직까지 사용하고 일터로 복귀하는 엄마들의 상태를 표현하자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각오를 다지며 출발선에 서있는 달리기 선수같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세팅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가능하다면) 좀 더 유연한 자리, 좀 더 가까운 자리를 찾아 협상하고, 친정, 혹은 시댁 근처로의 이사나 합가, 도우미 고용, 아이 기관 적응, 남편의 협조 구하기 등 '일 할 만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결의에 찬 전투태세 돌입이다. 


이때 일에 관한 활동과 육아에 관한 활동은 철저하게 경계 지워진다.

출근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옷을 입고,

퇴근하면서 '엄마'의 옷으로 갈아입을 계획을 세운다.

일단, 시간, 공간과 같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두 활동을 분리시킨다.

내가 아이를 돌볼 시간과 다른 사람에게 육아를 맡기는 시간을 구분한다.

두 정체성을 넘나들며 변신하는 일상의 수월함을 위하여...


적응기간: "처음엔 미쳐 지냈던 것 같아요."


칼퇴근, 단축근무, 잦은 돌봄휴가 신청...

괜스레 작아지는 나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다.

어지간한 조직문화가 아니고서는, 혹은 내 분산된 에너지와 시간을 덮어줄 정도의 대단한 역량이 아니고서는

왠지 당당하기가 어렵다.


퇴근 시간을 지키려면, 근무시간 안에 할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줌을 참고 커피 수다를 줄이며 일하기도 한다.

솔직히... 출산 전보다 시간 대비 업무 효율과 생산성은 더 높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입증하기도 어렵다.

남들의 시선, 상사의 평가를 신경 쓸 정도의 여력이 없기도 하다.


서로 전혀 성격이 다른 양쪽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은 통제 가능한 세상이라면 훨씬 더 버틸만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과 육아 병행이 어려운 이유는 일이든, 육아든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동 양육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엄마' 채널을 잠시 꺼야만 한다. 아이의 닭똥같은 눈물도 과감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 회사가, 상사가, 동료가, 혹은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리듬에 맞춰 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민폐 끼침과 눈치를 감수하고 본의 아니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 순간도 있다. 육아가 원활하도록 인적, 물적 자원을 운영하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게 안정적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튀어나온다. 아기가 아프거나(제일 빈번함), 돌봄을 도와주시는 분이 아프시거나, 그만두시거나, 어린이집에 문제가 생기거나...


어떤 경우이건 이렇게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육아 분업 체계'를 손봐야 한다. 


워킹맘들의 고충을 심리학의 '역할갈등이론'으로 설명할 때(이게 가장 고전적이고 잘 알려진 이론이다)

가장 많이 공감하는 것은 '시간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어려움(스트레스, 소진감 등)이다.

하지만 워킹맘들의 역할갈등은 마음이 힘든 것에 대한 이야기로만 다뤄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일상의 "루틴을 바꾸고 조율해야 하는 과정"에 대한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

이건 심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이다.


어떻게든 일과 육아의 일상이 각각 안정화되기를 바라지만

워킹맘들이 놓인 상황은 '불안정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새드 엔딩: 일과 육아는 애초에 통제불능인 것


이쯤 되면 깨달아야 한다. 

적응기간.. 워킹맘들이 말하는 복직 후의 적응기간은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들이 '적응했다'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일상에 적응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의 불안정성, 통제불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과 육아는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넘나든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

숱한 눈물바다와 갈등과 오해와 우울과 분노의 시간을 거쳐 

'처음부터 일과 육아가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두 영역을 명확히 구분짓는 것 보다는, 경계의 유동성을 인정하고 조율하는게 더 중요하다. 

그 변칙성을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순발력을 발휘하며 대처해야만 한다. 

앞만 보며 정주행할 수 없다. 이 달리기는 마라톤이다. 중간, 중간 마다 페이스를 조절하고 여건을 정비해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통제불능의 객체runaway object(핀란드 교육학자 Engeström, 2014)
영국의 사회학자 Giddens(2000)의 'runaway world(질주하는 세계)‘ 개념에 착안하여 제안된 개념이다. 인간 활동의 목표(객체)를 ’runaway object'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인간 활동의 통제불능의 변화무쌍함을 표현한다. 일과 육아 활동 역시 예측불허, 통제불능의 활동들이다(구유정, 2017,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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