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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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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스윗비 May 23. 2022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기

임신 당시 내가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은 다음이 아닌 천천히 걷는 것이었다. 훗날 노인이 되어 걸음이 느려지면 이렇게 세상 살기가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업무에 큰 지장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회진을 돌아야 하고, 환자에게 급한 콜이 오면 병동으로 보통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게다가 횡단보도 신호등은 왜 이렇게 짧은지? 뒤뚱거리며 걷다 보면 반절 조금 넘게 왔을 뿐인데 이미 신호는 깜빡깜빡하며 숫자는 점점 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빨간 불로 바뀌기 직전까지 매번 긴장하며 힘들게 몸을 움직여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내 몸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임신 전과 비교했을 때 신체 수행 능력이 떨어지니 내가 열등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 때도 있었다.



그래, 이 기회에 급했던 성격 좀 누그러뜨리자
내가 이렇게 수행할 기회를 얻는구나... 



나름 스스로 좋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응은 쉽지 않았다. 




아이는 벌써 네 살이 되었다. 나는 출산 이후까지도 많이 아팠지만, 많이 회복되었고 이제는 남들처럼 횡단보도도 씩씩하게 잘 건널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로 이제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다.

아이 덕분이다.


일단 걸음걸이 자체가 또래들보다 불안정하고 느리다. 아직 엄마 손을 잡지 않으면 계단도 혼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내 평소 걸음대로 아이가 걸으려면 거의 뛰다시피 해야한다. 결국 아이 속도에 맞추어  내가 천천히 걸어주는 수 밖에 없다.


걸음만 느린 것이 아니다.

아이의 레이더에는 왜 그렇게 새로운 것들이 많이 걸리는지, 길가에 핀 꽃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내 눈에는 그 나무가 그 나무고, 그 꽃이 그 꽃인데 뭔가 다른 게 보이자마자 쪼르르 달려간다.


무슨 꽃이에요? 찾아주세요!


요즘 나의 외출 필수품은 스마트폰 '꽃 검색' 기능이다. 사진을 찍어 꽃 이름을 검색할 수 있다니, 세상이 좋아졌음에 감사하며 꽃 이름을 찾아 알려주면 아이는 그 이름을 입으로 말해보며 살살 꽃잎을 쓰다듬는다.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그렇게 작은 꽃들을 보고 알아간다. 이제 다시 출발하자~ 겨우 달래 길을 다시 나서면 몇 걸음 가다가 또 멈춘다.


개미가 있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천천히, 느긋하게 흘러간다.

가끔 횡단보도에서는 아이를 들어 안고 뜀박질을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아이에게 맞춰 걸어보려 한다. 애초에 일정을 빠듯하게 잡는 것도 포기했을뿐더러, 생각해보면 그렇게 급할 일도 없다. 그건 그저 내 계획이고 내 조급 함일 뿐,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두 쪽 나지도 않는다. 아이의 인생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서울 한복판에 씀바귀 꽃이 피어 있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평소라면 개미가 바닥에 기어 가는지조차 보지 않고 밟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 같이 바쁘고 치열하게 살던 인생 말고, 이렇게 인생을 느긋하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서울 한복판에 씀바귀 꽃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이를 제법 키운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는 친구들과 약속 잡고 공부하러 학원 가느라 바빠 같이 보낼 시간도 별로 없다 한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내게 선물해주는 이런 시간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감사하게 이 시간을 소중히 즐겨보기로 한다.


오늘도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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