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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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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스윗비 Mar 10. 2022

당신의 일상은 무사하십니까

아이와 응급실에 다녀와서

한 주간 아이가 아팠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으나 열, 기침, 가래로 고생하다 겨우 열이 떨어질 무렵. 자꾸 처지면서 잠만 자고, 일어나서는 심하게 보채며 괴성을 지르고, 다시 지쳐 잠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정점을 찍은 사건은 아이가 갑자기 물건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이었다. 안 보인다면서 엉엉 우는 아이를 들처 안고 놀란 마음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여러 가능성과 질문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장 최악은 아이의 뇌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일어나거나 시력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부디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회복되는 일이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이가 겪은 증상의 원인은 복용했던 약물의 부작용으로 판명이 났다. 며칠 고생한 후에 무사히 회복되었고 나도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런 순간들은 이따금씩 있어왔다.


낯선 괴한에게 납치될 뻔했다가 도망쳐 나왔을 때에도

수술을 위해 전신마취에 들어갔을 때에도

기형아 검사에 이상이 생겨 양수 채취를 할 때에도

원인 모를 열에 시달리던 아이의 심장 혈관을 검사할 때에도


어쩌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살아가게 했을 사건들은 항상 있었다.

그중 몇 가지는 현실이 되었고, 몇 가지는 그나마 무사히 지나가 다행이라며 회고할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일상으로 복귀하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성적으로 유린당할 수 있고, 희귀 질환에 진단되어 평생을 고생할 수도 있다. 장애 아이를 돌봐야 하는 늙은 부모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삶은 꿈꿔 보지 못하는 생명들도 있다. 전쟁으로 온 가족이 흩어지기도 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세상이다.


내가 어찌어찌 그 일들을 피해 지나왔을 뿐,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현재 진행형의 삶이다.
누군가의 삶을,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내가 감히 감사해도 되는 것일까?



나의 이 안도감이 마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지나치며 휴, 나는 앞을 봐서 천만다행이야 -라고 말하는 싸구려 우월감 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죄스러움이 몰려왔다. 안도감은 곧 불편감이 되었다.





당연한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이렇게 사실 엄청난 우연과 행운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은 단단한 암반이 아니라, 모래알 같은 것이다.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중대한 일이나 불청객이 찾아와 균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잊고 산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앨 수는 없다.

그 불행은 아무리 잘나 보이는 사람에게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을 감사히 충실히 사는 것뿐이다.

그 바탕에는 누군가와의 비교나 우월감, 동정심이 아닌 언제든 내게도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겸허한 마음, 타인에 대한 존경과 응원의 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혹여 나에게 그런 생이 주어진다 해도 꿋꿋하고 용기 있게 살아내 보리라,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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