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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Jan 11.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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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천 편집장은 만감이 교차했다. 하필이면  멀고  파리인지, 그것도 홍콩을 경유하고, 다시 마닐라 찍고, 그리고 파리까지! 더군다나 마닐라에선 꼬박 하루 가까이 공항에만 머물러야 한다. 필리핀까지만 간다면 오히려 고마워했을 것이다. 태평양을 바라보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있을 테니까.  비행공포 따위나 가진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동희에게 주라고 건네받은 고철덩어리는  뭔지, 적당히 둘러대라? 젠장!

응천은 원망과 짜증이 한데 섞인 중얼거림으로 서류더미를 정리했다. TV   장면이 떠올랐다.  태평양이었을 것이다. 하늘빛 바다는 물결이 잔잔했다. 바닥에 모래가 환히 보였다. 구름   없는 짙은 파란 하늘에 야자수가 솟아있었다. 강렬한 빛을 뿜는 태양은 노란색이 틀림없다. 그제야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같았다. 기다란 나뭇잎들이 살랑거렸다, 아주 부드럽게. 편집된 영상과 함께 다니엘 리까리의 사랑의 전주곡이 흘러나왔다. 뒤에 엄마가 앉아있었다. 엄마 화장품 냄새가 그를 흥분시켰다. 텔레비전 앞이었지만 그곳은 천국이었다. 옥색과 하양, 파랑, 갈색, 초록이 노랑과 함께 어우러졌다. 기억  그곳은 아득한 과거가 미래의 이상향과 만나는 공간이었다. 그런 태평양을,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태평양을 놔두고 하필   유럽까지 다니! 동경은 했지만 막상 가려니 짜증이 났다. 어느 곳보다 작위적인 ! 오래된 문명의 이름으로 위선이 고상한 품위로 탈바꿈해 고착된 그곳! 계속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지금은 가야 했다. 여행지에 대한 감상 따위로 불평할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여행의 의미는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감내할  있다. 그때, 머릿속에 아버지가 떠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냉소가, 조소가, 자조(自嘲)까지 환청처럼 뒤따랐다.

아들 넷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법한 유명대학 교수. 아버지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는 이상이 있었다. 아들들이 지적이며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되어야 했다. 아들들은 서로 경쟁하며 자랐다. 둘째였던 응천은  꼴찌였다. 형의 비웃음과 동생들의 무시,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기쁨을 선사하지 못한 자괴감이 가장 괴로웠다. 응천의 지적 수준과 육체적 능력은 대한민국 평균 이상을 월등히 상회했지만 자신 머릿속 그는  열등한 존재였다.


“둘째 형은 아버지 친구분들이 주는 광고 없었으면 진작에 잡지사 말아먹었을 거 아냐! 으하하하!” 사악한 간신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막냇동생이 그의 부재를 믿고 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4형제를 소집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응천은 막내의 비아냥을 우연히 엿들었다. 딱히 반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모른척했다. 천성이 여린 응천은 언제부턴가 모든 경쟁을 유치하게 여겼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난 뒤였다. 꿈도 생겼다. 그 꿈은 자신의 이상향으로 그녀를 데려가는 것!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보이는 깊은 동굴 한가운데 터를 잡고 그녀와 함께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은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릴 것이다. 자애로움이 법이며 공정( 公正)은 숨 쉬는 공기처럼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상식이 될 것이다.

주머니 속 작은 보석함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와 이루는 단란한 가정! 그것만이 그의 진실된 꿈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꿈은 이루어진다, 분명 이루어질 것이다.


똑똑똑 투명한 문을 두드린 동희가 편집장실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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