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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Jan 17.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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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이었다. 그날 동희는 일찍 잠을 깼다. 평소처럼 현미 시리얼에 오렌지 주스를 부어 먹고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집을 나섰다. 밤사이 내린 비로 공기가 깨끗했다. 수분을 머금은 바람은 차가웠다. 출근했을 때 사무실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편집장이 떠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편집장실은 몇 개월은 비어있던 것처럼 처연했다. 라이프저니 12월 호는 특별한 이슈 없이 마감했다. 11월호가 놓친 내용과 후기들로 채워졌다. 오후가 되자 동희는 다시 답답함을 느꼈다. 어느 시점 이후로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계속해서 그를 사무실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사무실 주변 거리를 잠깐씩 배회하는 횟수가 늘었다. 그날은 작은 하천 쪽으로 갔다. 언제나 편집장과 함께 건너던 다리를 혼자서 건넜다. 차가운 바람에 실려오는 물 내음이 상쾌했다. 걸음걸음이 익숙했다. 이제는 동희도 이 동네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세련된 편집장이 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게 대부분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거리엔 사람도 없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아직까지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동네도 개발되고 나면……’ 갑자기 경멸의 감정이 몰려왔다. 미개발지역을 빠져나올 때 정장 차림 사내 4명이 자신을 지나쳐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날 출근한 동희는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진작에 와있었다. 며칠 메일 확인을 안 한 탓에 몰랐을 뿐. 처음엔 스팸메일로 생각했다.



지금  순간에도 정부는 드림캐리어가 의료용으로 개발한 칩의 설정을 바꾸어 국민들을 감시하고 제어하려 .

그럼에도 모든 잘못을 드림캐리어 탓으로 .

사과는커녕 모른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를  이상 묵과할  없음.

모든 능력을 동원해 정부의 대국민 범죄행위를 종결시키려 .

12 10 정오까지 정부가 아래 조건을 충족 시기키 않을 경우, 모든 칩을 무력화 시킴.

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겠지만 칩이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선 어쩔  없는 최선의 선택임.

 모든 책임은 정부에게 있음.

첫째, 드림캐리어社에 대한 불의한 수사를 당장 중지할 ! 둘째, 감시와 제어의 모든 전모를 소상히 밝히길 ! 셋째, 관련자 처벌과 재발 방지책을 제시할 ! 넷째, 진심 어린 대국민 사과를  !

이상.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메일은 문장이 간결했다. 누가 보낸 것일까? 내용만 놓고 보면 드림캐리어社와 관련 있는 인물 같았다. 한칠오일까? 12월 10일이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날 칩에 무슨 짓을 벌인다는 것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칠오에게 전화했다. 이젠 아예 없는 번호였다. 충격적인 내용이 분명했지만 그 충격이 체감되지는 않았다. 심층취재를 맡은 대가로 책임져야 할 일이 늘어난 기분이 들뿐이었다. 그 책임감은 귀찮음보다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 된듯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통 헬멧 프로그램 해킹 주체는 정말 정부일까?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지만 사무실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 2시가 지나있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근처 샌드위치 가게라도 가서 무얼 좀 먹고 싶었다. 먹으며 차근차근 생각하고 싶었다. 가게로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 동희를 불렀다. 정장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서있었다. 낯이 익었다. 주위에 이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저요?”

“정동희 기자님 이시죠?”

“네, 그런데, 누구시죠?”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카페도 좋고 원하시는 곳 어디라도요.”

“이야기도 좋고, 카페도 좋은데, 누구신지 신분을 먼저 밝혀주셔야죠.”

한 명이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내 굳어진 동희 얼굴에 들이댔다. 소위 말하는 ‘요원’이었다. 사내들 눈을 쳐다보았다. 잠시 뒤 건물 모퉁이에서 사내 2명이 더 나타났다. 역시 정장 차림이었다. 자신이 쓴 기사 때문일까? 동희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뒤에 나타난 정장 중 한 명은 유독 팔자걸음이었다.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설령 이들 신분이 거짓이 아니라 해도 무작정 이들에게 협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혼자고 이들은 넷이다. 이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내막은 알고 싶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여기서 하시죠, 제가 좀 바빠서요.”

“흠! 여기서요?”

“아님 제 사무실로 가실까요?” 동희가 편집장처럼 양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동희와 가장 가까운 정장 사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때 팔자걸음이 입을 열었다. 급히 온 탓인지 호흡을 고르느라 숨소리가 거칠었다.

“좋아요, 원하신다면 여기서 말씀드리지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까? 분명 기자님은 알고 계신 듯한데요?”

“네?”

“좋아요. 모른 척하셔도 저흰 다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정동희 기자님이 그제 받은 메일을 보낸 사람이 누구죠? 그리고 12월 10일 날 칩을 무력화시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습니다.” 순간 동희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번쩍였다.

‘이 자들이 내가 받은 메일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몇 십분 전 사무실에서 클릭한 메일에 달라붙어있던 비현실감이라는 바이러스가 현실세계로 뛰쳐나온 것 같았다.

“아! 요즘엔 그렇게 할 일들이 없으신가 봐요? 국민들 메일이나 뒤지시고요.” 겁은 났지만 동희는 나름 호기를 부렸다.

“국가 전복 행위로 수배 중인 인물에게서 온 메일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죠? 우린 당연히 봅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린 뭐든 합니다. 그게 저희들에겐 애국인 거죠, 합법적인 애국!” 팔자걸음이 말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그는 넷 중 가장 직책이 높을 것이다.

“저희들에게 협조하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기자님께 메일을 보낸 자는 국가 전복 및 이적 행위자로 긴급 수배 대상입니다.” 팔자걸음은 계속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이야기했다. 여유로워 보였다. 혹시 칠오가 메일을 보냈다면? 칠오가 이적 행위자? 동희의 머릿속에서 두 번째 번개가 내리쳤다. 한 번도 칠오를 수상히 여겨본 적은 없다. 물론 이들 말도 다 믿을 순 없다.

“저도 누가 보낸 메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이적행위를 했다는 겁니까?”

“얼마 전 각기 다른 IP로 저희 서버에 접속하려는 시도가 다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자님께 메일을 보냈고 역시 동일한 IP로 북한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추적 결과 해외로 추정되는데 분명 국내에도 접선책을 두고 있을 겁니다. 정동희 기자님이 억울한 누명을 벗으시려면 더더욱 저희들에게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 직급쯤 되어 보이는 이가 대답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럴 땐 이들 반대편에 있는 사람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판단이란 양쪽 말을 다 듣고 내리는 것이다.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쪽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한쪽 말만 듣고 이들 요구에 응하는 것은 무언가 경솔하고 불공평하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잘못하다간 이들이 엮어놓은 시나리오에 끼워 맞춰질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특히, 이들이 성과 올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만에 하나 입을 잘못 놀린다면, 자신 또한 간첩으로 몰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 조직은 전에도 누군가에게 그런 짓을 했다. 동희가 부모님을 통해 깨달은 바에 따르면 이들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하지만, 일단 이들 이야기를 더 들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설마 무슨 짓 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동희 머릿속은 앞으로 5분 동안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협조할 테니, 가시죠! 어디 앉아서 방금 하신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감사합니다. 그저 몇 가지 질문에 답해주시면 됩니다.” 동희가 순순히 협조할 태도를 보이자 정장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때였다. 자신들 뒤를 바라보던 동희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저 사람이에요! 저기 보세요! 제게 메일을 보낸 사람이 저 사람 같아요! 저 트럭 뒤로 숨었어요!” 동희가 그들 등 뒤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놀란 정장들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동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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