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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Jan 20.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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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가 탄 지하철이 희권이 근무하는 병원 근처 역에 멈췄다. 첫 통화 후 금방 볼 것 같던 두 사람은 서로가 바쁜 탓에 그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동희가 희권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의 전화번호는 분명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다. 하지만 전원을 켜는 순간 추적이 들어올 것이다. 지인 전화번호 몇십 개쯤은 줄줄 외던 이삼십 년 전 사람 기억력이 새삼 부러웠다. 결국 성과 없이 근처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대표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외과병동에 근무하는 고희권 의사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죄송하지만 개인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순간 멍청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친군데요, 깜빡 잊고 휴대폰을 안 들고 나와서 그럽니다. 오늘 꼭 만나야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희권 선생님 오늘 낮 근무시네요. 외과병동으로 문의해 보세요.”

꼬박 두 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동희는 희권을 만날 수 있었다.

“너무 기다렸지? 그러게 왜 연락도 없이 왔어!”

“그러게, 미리 연락하고 왔어야 하는데......” 동희가 말했다.

“아무튼, 잘 왔어, 그렇잖아도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서 연락하려 했었는데…… 그건 그렇고, 너무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냐? 일단 저리로 가자, 산책로에 벤치가 있을 거야.” 병원에 딸린 작은 정원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한 동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웃을 때마다 이마에 두렷한 주름이 잡히고 키가 조금 더 자란 것만 빼면 희권은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에서 옛 기억들이 스며 나왔다. 동희를 위해 키우던 개를 제집에 밀어 넣고 몸으로 막을 때 짓던 미소가, 새로 산 만화책을 먼저 보라고 빌려주며 코를 문지르던 버릇이, 놀러 온 동희에게 먹고 싶은 것 다 고르라며 조금은 뻐기듯 움직이던 입 모양이 떠올랐다.

“너한테 빌린 만화책 돌려주려 했는데, 갑자기 이사를 갔더라고. 연락처도 바뀌고……” 동희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랬었나? 그때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어. 아버지가 무리한 투자를 하셨지. 겨우 부도는 막았지만 사업 반 토막 나고, 전셋값 싼 동네 찾아 이사 가고…… 대입 앞두고 전학이 말이나 돼? 다행히 아버지 친구분들이 우리 희권이 대학은 보내야 된다고, 뭐, 그렇게 도와주셔서, 계속 공부할 수 있었어. 재수했지만 그래도 의대 들어갔잖니. 그분들 아니었으면 의사는 꿈도 못 꿨을 거야. 근데, 우리 그때 만화 엄청 봤었다. 그지? 그때가 좋았는데......”

친구들에게 선심 쓰며 살던 희권이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닥친 생활고는 분명 힘든 시련이었을 것이다.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은 아마 그때 생겼는지 모른다. 동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뜩이나 민감한 사춘기였으니 그의 자존심이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 덕에 그는 다시 자부심으로 차있었다. 한동안 과거 이야기로 마음을 나누던 이들이 잠시 침묵했다.

“너는 옛날부터 소설 쓴다고 분위기 잡더니 결국은 기자가 됐네!”

희권이 먼저 침묵을 깼다.

“작은 잡지사에서 이것저것 긁적이고 있어.”

“얼마 전 네 기사 잘 읽었다.”

희권이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종합병원은 규모가 컸다. 경찰특공대가 쏜 고무탄을 맞고 쓰러진 드림캐리어 연구원을 그 병원에서 치료하고 있었다.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은 연구원은 차츰 회복되고 있었다. 아직 뇌 일부는 정상 작동하지 않았지만 대화를 나눌 정도까지 호전되었다. 아이 같은 말투였고 동일 내용을 반복해서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희권이 동희에게 연락하려는 찰나 동희가 먼저 희권을 찾은 것이다.

“제보라는 게 그거야?”

희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은 밝았지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초겨울이었다. 친구가 건네 준 커피는 이미 차가웠다. 동희가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조만간 그 환자와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볼게.”

그때 희권이 차고 있던 페이져가 울렸다.

“이런, 지금 가야겠다. 어떡하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야 하는데, 조만간 식사 한번 하…….”

“혹시 너 혼자 살아?” 동희가 대뜸 희권의 말을 끊었다. 희권은 대답 대신 동희 눈을 바라보았다.

“너네 집에서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어두워지고 있었다. 희권은 계속 말이 없었다. 눈만 반짝였다.

“내가 문제가 좀 생겼어.”

“뭔데?” 그제야 희권은 어색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지금 쫓기고 있다.”

어둑어둑한 희권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눈만은 계속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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