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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Jan 21.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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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택시로 15분 거리에 있는 희권의 오피스텔은 생각보다 작았다. 한쪽 구석에 쌓아둔 책 더미 속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먼지로 덮여있었다. 지난 기종이었지만 작동에 문제는 없었다. 희권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넣었다. 바탕화면이 만화영화 포스터였다.

‘아직도 만화를 좋아하네!’

동희가 인터넷에 접속했다. 언론사 주요 뉴스는 온통 자신이 제보한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12월 10일 정오에 무슨 일이?’, ‘12월 10일 정오, 대한민국 멸망?’ 자극적인 문구들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다음날 오전 10시에 김영주 의원의 새로운 기자회견 소식도 보였다. 프로그램 해킹 관련해 대통령이 직접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는 내용의 뉴스도 있었다.


그날 밤늦게 근무를 마친 희권이 오피스텔로 왔다. 손에 통닭과 캔맥주가 든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저녁은? 뭘 좀 먹었어? 한 잔 하자! 내일은 야간 근무니까.”

잠시 뒤 닭 뼈 옆에 찌그러진 맥주캔이 쌓였다. 두 사람 모두 취기가 올랐다. 희권은 얼굴이 벌갰다.

“그래서,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동희의 무용담을 들은 희권이 물었다. 동희는 말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희권이 작은 냉장고에서 반쯤 남은 고량주를 꺼냈다. 서랍을 뒤져 나온 종이컵에 고량주를 따라 동희에게 건넸다. 동희는 고량주를 보며 편집장을 떠올렸다. 출장 마치고 돌아온 편집장이 귀한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것 같았다.

“우리 중학교 때, 반 애들이 왕따 시키던 얘, 기억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희권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이…… 눈 작고 얼굴 크고…... 아무튼, 난 걔가 가끔씩 생각나. 걔네 엄마가 돌아가셨나, 아님 이혼했었나, 뭐 그랬지 싶어. 아빠랑 여동생과 함께 산다고 들었는데. 걔네 아빠는 실내 포장마차를 하셨지. 언제 학원 마치고 돌아갈 때 걔네 아빠 가게를 지나는데, 학원 차 안에서 보니까 걔가 걔 여동생이랑 그곳에 있더라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가게 문 밖에서 걔네 두 명이 자기 아빠한테 혼나고 있는 거야. 씩씩대던 걔네 아빠가 뺨까지 때리는데, 걘 아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고, 마른 몸이 더 초라해 보이더라. 여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인가 중1쯤 되어 보이던데, 오히려 반항하듯 고개 빳빳이 들고 딴 곳 보고 있더라고. 우리 반 애들이 걔만 보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싶어 진다고 했잖아. 아! 이제 기억났다! 승선이! 걔 이름이 승선이었다!”

“그래! 승선이!”

“울 아버지 사업 때문에 힘들어지니까 승선이가 제일 많이 생각나더라.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실내가 더워졌다. 희권이 양말을 벗어 구석으로 던졌다.

“사실 우린 다른 애들이 걔 괴롭힐 때 보고만 있었잖아, 우리일 아니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잖아. 고놈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뭐 그런 생각이 그제야 들더라고. 지가 고생해봐야 남 사정을 안다고, 더 안됐던 건, 어느 날인가 역시 학원 차 안에서 봤는데, 아빠 일 도와주다 잠깐 쉬는 모양인지, 승선이가 가게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더라고. 자세히 보니 작은 길냥이를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먹이고 있는 거야. 뭐, 손님들 먹다 남긴 음식이었겠지? 그런데, 동희야! 잘 들어봐! 그때 그 녀석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는데, 분명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어. 길냥이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수다쟁이처럼 말이야. 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승선이가 그랬다는 걸? 승선이 말하는 것 본 적 있어? 교실에선 말 한마디 없던 승선이가, 그래서 입이 쪼그라들었다고 친구들에게 놀림받던 승선이가 말이야!”

희권이 종이컵에 든 고량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카! 말하고 보니 꿀꿀하네! 내가 이런 이야기 왜 하지? 야! 한 잔 더 따라줘 봐.”

동희가 술 따를 틈도 주지 않고 스스로 고량주를 따라 입 속에 다시 들어부었다.

“고놈 지금 잘 살고 있나 모르겠다. 누군가는 동정심을 폄하하지만, 난 동정이 공감의 기본이라 생각해. 동정심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도 못 할 거다, 절대로.”

희권이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눈을 치켜떠는 바람에 이마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많이 지쳐 있던 두 사람은 곧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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