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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북이 Jan 09. 2021

계획 없이 시작된 2021

불안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새로운 시작에는 늘 계획이 뒤따랐다. 어쩌면 뒤따랐다기 보다도 우선시되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방학 계획을 세우고, 3월이 되기 전에 새 학년의 계획을 세우고, 1월 1일이 되기 전에 새해 계획을 세웠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야 준비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혹여 계획 세우기를 잊기라도 하면 불안감에 휩싸였다.


미리 준비하고 목표를 세우는 건 좋은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시작되기 전에 계획표가 책상에 딱 붙어있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했던 내게 '마무리'는 잊혀졌다. 방학 숙제지의 맨 앞면을 차지한 동그란 '하루시간표'를 채우라고 말할 때 선생님은 지난 한 학기가 어땠는지, 뭐가 아쉬웠는지,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묻지 않았다. 12월 31일 친구와 다음 해 다이어리를 서로 자랑하면서도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눠본 기억도 없다.


그래서 나는 2021년의 계획을 세우지 않고 2020년을 마무리해보기로 했다.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도 않고 던져버렸던 지나간 일에 대해 성의 있게, 진심을 담아서 꾹. 가장 먼저 한 일은 2020년을 기억하게 해줄 순간을 정리하는 거였다. 평생을 미뤄온 숙제였던 운동을 도전한 결과인 10개 산의 정상, 두 번의 마라톤 완주. 길어지는 취업준비에 자꾸 까먹는 성취감을 일깨워 활력을 만들어준 카페 아르바이트. 추워지는 날씨뿐만 아니라 심각한 코로나 확산으로 시작된 집콕생활에 터닝포인트가 된 유튜브 채널 운영. 아쉬운 것도 많고 부족함도 많이 느꼈던 한 해지만 내가 걸어온 시간에서 조금씩 만들어진 지금의 내가 보였다.


올해 잠깐의 순간이었음에도, 그리고 항상 곁에 있어준 사람들에게도 빠지지 않고 연락을 해봤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어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을 만난 순간마다 크고 작은 변화를 맞이했다. 그 순간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그 한 마디를 건네니까 빈틈없는 마침표를 찍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새롭게 탈바꿈하고, 새출발하고, 새로운 전환을 맞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미래의 내가 묵묵히 함께 걸어온 과거의 나보다 더 존중받고 우대받아온 건 아닐까. 평소와 다름없이 다시 떠오른 태양은 아무런 목표를 세우지 않고 일어난 나를 꾸짖지 않았다. 좋은 시작에 앞서 좋은 마무리가 상쾌했을 뿐이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습관처럼 다시 올해의 다짐을 세웠지만 적어도 2021년 12월 31일에 할 일을 향해 작은 기대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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