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아십니까에 당한 것 같지만
엊그제 저녁, 올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습관처럼 숨죽이고 그냥 아무도 없는 척을 하다가
인터폰을 보니 무테안경을 쓴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있더라
보통이라면 그냥 조용히 있다가 알아서 가길 기다렸겠지만
나도 모르게 갑자기 궁금해져서
인터폰을 두고 누구세요,라고 해봤다
그러자 머리로 달달 외워뒀던 대사를 쏴대듯 열심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들은 어떤 절? 사찰에서 왔는데
어린이들, 노인들과 같은 취약계층에 도움을 주고자
쌀을 나눠달라는 말이었다
옛날에 초등학교 때 빌라에 살 때
집에 군인들 찾아와서 라면 나눠달란 적은 있었는데
요즘 세상에, 특히 이 코로나 시국에 가정으로 쌀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취약계층에 도움의 손길 나눠달라는 말에
쌀이야 뭐 나눠주지 뭐, 하면서 쌀을 한 봉지 퍼서 나눠줬다
ㅋㅋㅋ
나도 참 정말 순진하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 한 분도 옆에 같이 와있었다
둘이 짝지어서 다니시나 보다
쌀 주면 그냥 바로 갈 줄 알았는데
스몰토크를 이끌어 나가시더니 빅토크로 이어지면서
도움을 줬으니 이후에 기도 올릴 때 내 소원도 같이 빌어주겠다고 하시면서
이름과 소원을 말해보라 하시길래
진짜 딱히 없어서 음, 건강이요 라고만 했더니
음력 생년월일을 물어보시길래 이걸 또 그냥 알려줬다
그러자 핸드폰으로 만세력을 보시면서
갑자기 냅다 사주를 봐주시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근데 이게 또 재밌는 게
사주를 또 은근 잘 보시는 것 같더라
나도 사실 원래 사주나 타로 같은 걸 재미있어하는지라
갑자기 공짜로 (물론 쌀은 퍼줬지만) 방문 사주를 봐주시는데
재밌어서 그냥 또 그걸 듣고 있었다,
오.. 그래요? 아.. 정말요? 이렇게 열심히 호응까지 하면서 재밌게 들었다
진로, 재복, 건강, 결혼운 등등 일반적으로 사주를 잘 봐주시다가
마지막쯤엔 나 같은 사람은 기도를 많이 올려야 한다면서
기도를 열심히 올리라는.. 기도 쪽으로 좀 이야기가 점점 빠지길래
아, 한번 절에 나와서 정성보여라 돈 달라 이런 소리하려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끝까지 돈 얘기는 안 하고 그냥 그러고 바로 깔끔히 가셨다
뭐지, 내가 쌀은 있지만 돈은 없어 보였나?
초인종이 울리면서 친구한테 '잠깐만' 하고 자리를 비웠다가
그분들이 돌아가고 나서 보니깐 30분이나 지나있었다
30분 동안 쌀 퍼주고 문 앞에서 사주보고.. 참
친구들한테 바로 썰을 풀었더니
그래서 뭐라는데, 하면서 깔깔대고 웃다가도
그걸 애초에 왜 열어주냐,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넌 가끔가다 엉뚱할 때가 있다, 거기서 쌀을 왜 퍼주고 앉았냐, 라면서 혼나기도 했다ㅎ
예전에 스무 살 때 홍대 거리 지나다가
무슨 5천 원짜리 문화생활 즐기는 카드였나, 그거 강매 아닌 강매당한 이후로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가 말 걸어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집으로 쌀 달라고 찾아온 건 또 처음이라 순진하게 쌀 퍼주고 사주 듣고 참..
인터넷 검색해보니깐 정상적인 절에서 가정으로 쌀 시주받으러 안 다닌다더라
그리고 정말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문을 열어줬는지 참
다행히도 쌀만 퍼주고 별 일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 경계하면서 조심히 살아야겠다
순진하고 의심 없이 살면 큰코다치는 세상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