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도댕 Dec 23. 2023

지구력

그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런 내게 부모님은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내가 무얼 하든 뭐라 하는 법이 없었고, 학원을 의무적으로 보내지도 않았다. 지금껏 내가 뭐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이유다. 피아노가 배우고 싶으면 피아노를, 첼로가 배우고 싶으면 첼로를, 드럼이 배우고 싶으면 드럼을, 사진이 배우고 싶으면 사진을, 그러다 영어가 배우고 싶으면 영어를, 수학이 배우고 싶으면 수학을, 공부는 하고 싶을 때만 했고 수업시간에는 딴생각을 하거나 새롭게 빠진 관심사를 떠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뭐든 곧잘 했고 곧장 질리는 것도 내 지구력의 한계였다.


진로를 예체능으로 정하게 되면서 공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지만 수업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도, 아니 문제집을 산 기억도 거의 없는 나는 수능 성적도 중간은 했다. 예비합격 1군데를 제외하고 지원한 대학에 전부 붙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이든 잘하는, 아니 해도 되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땐 내가 어디 대단한 부뚜막에 오른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말수가 줄어들었고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곤 다가가 말을 거는 법도, 다가오는 이에게 곁을 내어주는 법도 몰랐다. 1년 간의 휴학을 마치고 조금씩 변화를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더딘 나의 성장은 나를 더욱 움츠려 들게 했고 급기야 나는 내가 사랑한 것들에게서 손을 뗐다. 그건 일시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부뚜막에 오른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졸업 후 내가 얼마나 많은 직종전환을 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관심사에 기웃대며 시간과 열정, 젊음을 태웠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인간이 태어나 겪는 모든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좋은 비료가 될 거란 믿음에 처음으로 의구심이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일군 땅에 아무것도 싹 틔우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때의 절망감은 지금껏 이어져 나는 여전히 지구력이 부족한 내게 염증을 느낀다.


스스로를 전보다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된 지금에 와서도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자주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부족한 지구력은 타고난 불안에 있는 게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막상 100%를 달성했을 때 그 끝에 별 볼 일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 갖은 핑계를 대며 신고 있는 신을 벗기고 마는 것이다. 더는 오지 말라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기어이 겁을 주면서. 나는 한 번의 실패에도 자주 겁을 냈고, 실패를 지레짐작하며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볼품없는 지구력이 나를 더 지옥으로 잡아끄는 줄도 모르고, 그땐 바보같이 도망가는 것밖엔 몰랐다.


과거의 나를 책망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하고 싶은 게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열심히 산 나를 칭찬해야 하는 건지, 더는 후회하지 말고 이제는 전진해야 할 때라고 독려해야 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른다. 그러니까 답을 모르겠는 나는 이렇게 심란한 밤이면 글을 쓴다. 적어도 오늘 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전 02화 질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