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치
살면서 우리는 타인에게 몇 번의 질투를 하고 몇 번의 응원을 하고 몇 번의 존경을 표하게 될까. 요즘 들어 불쑥불쑥 질투라는 감정이 튀어나올 때면 별로인 인간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금세 내려앉는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에 손에 쥔 끈을 하나씩 놓고 싶어질 때마다, 그 어려움의 발단에 시기심은 없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내가 그들을 멀리하게 된 이유 중에 과연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없었는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없었는지, 그래서 부질없는 것들은 놓아버리려 한 게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 질투의 임계치에 다다른 건가. 질투나 시기심은 미성숙한 인간들에게나 발현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결국 나는 가벼운 질투조차 느끼면 안 되는 인간이라고 다짐하게 했다. 그 정직하고도 미련한 다짐이 여기저기 모난 마음을 새게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질투라는 감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어, 어떤 이에게는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표하게 된다. 너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보다 더, 넌 그래도 돼. 무조건적인 사랑은 부모와 아이에게만 따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친구에게, 때로는 동료에게, 때로는 스승에게, 때로는 연예인에게, 때로는 생면부지 타인에게, 그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나 쉽게 내어줄 마음이면서, 대체 질투는 어째서 드는 걸까.
한 인간의 꼬인 실타래를 풀자면 끝이 없다. 아마도 평생에 걸쳐 찾아야 할 일일 것이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누군가가 부러울 것이고, 외모나 몸매 콤플렉스가 심하다면 자신과 반대되는 누군가가 부러울 것이다. 또한 가진 실력에 비해 이룬 성과가 없거나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가진 실력에 비해 승승장구하거나 일이 잘 풀리는 누군가가 부러울 것이다. 자신과 반대편에 선 사람을 본보기 삼거나 자극제 삼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으련만, 질투나 시기심 따위의 감정이 첫째로 들기도 한다. 첫째로 드는 감정은 통각 같은 거라, 애초에 통제되는 감정이 아니라고 본다.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맵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제어 제한의 영역이 아닐까.
좋은 학교나 직장에 대한 염원이 큰 사람은 그 집단에 속한 이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질투심이 든다. 연애에 대한 갈망이나 불만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로맨틱한 커플에 대한 질투심이 든다. 결혼이나 출산이 조급한 사람은 신혼부부나 애기 엄마아빠에 대한 질투심이 든다. 하다못해 우리 아이는 발달이 느린데, 저 집 아이는 발달이 빠르다며 근심이 번진 질투를 낳기도 한다. 과연 이뿐일까. 더 좋은 집에 사는 누군가, 더 좋은 차를 타는 누군가, 더 많은 부를 이룬 누군가, 그러니까 이것들은 평생에 걸쳐 안고 가야 할 감정의 하나일 것이다.
애초에 통제되는 감정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질투의 임계치를 높여보는 건 어떨까. 이상향으로 나아갈수록, 좀 더 나은 현재를 위해 발버둥 칠수록, 갈망과 염원,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질투심은 점점 바운더리가 좁혀질 것이다. 그 끝에는 지금보다는 잔잔한 호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