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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Mar 22. 2016

아홉. 인터뷰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반환점이 보인다. 곧 급수대도 보일 것이다. 출발선에 비해 한층 무거워진 발걸음이 느껴진다. 가빠지는 숨결마저 다스리려면 꼭 내 물을 마셔야 한다. 앗. 손을 뻗으려던 순간 앞 선수가 내 물통을 바닥에 흘린다. 한쪽에 마련된 생수통을 급하게 낚아챈다. 비록 이온음료와 물이 섞인 내 것은 아니지만 생수로 목을 적신다. 뜨거워진 몸을 적신다. 조급해진 마음까지 적셔보지만 쉬이 편해지지 않는다. 후반부 코스에는 오르막길이 있다. 제멋대로 풀리려는 마음과 다리를 모두 꽉 붙잡아야 완주할 수 있다. ‘하나 둘 하나 둘’ 오늘의 피날레는 내가 기어코 장식해야겠다.   


 "조금만 더! 화이팅" 코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와 버릴 것 같다. ‘그래, 끝이 보인다 ‘ 주저앉을 것만 같은 뜀박질에 응원을 한다. 상대는 겨우 1m 앞서 있다. 이번 대회를 위해 나는 2만 km가 넘는 거리를 달렸다. 주먹을 단단하게 움켜쥐며 상대의 등을 노려본다. 남은 거리는 겨우 300m.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온 내장들이 뒤엉키는 것 같다. "다 왔어. 다 왔다고" 이미 쉬어버린 코치의 목소리도 점점 커진다. 결승라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온 힘으로 공기를 뚫고 앞으로 뛰어나간다.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파고든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누운 채로 이불을 더듬어 핸드폰을 잡는다. 새벽 5시.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더 이상 알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을 다시 감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먼지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집은 조용하다. 습관이란 게 이리 무섭구나, 피식 웃음이 난다. 새벽 공기를 맡지 않아도 되는 날을 수없이 바랬건만 다시 잠이 오질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나는 모든 것이 보인다. 개어놓은 운동복, 아침마다 드는 아령, 여러 대회에서 받아 온 메달, 실업팀 동료들과 찍은 사진, 심지어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마저 보인다. 오늘따라 초침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다. 새벽의 어둠을 찢으려나보다. 초침 소리에 내 고막이 찢기고, 내 심장이 찢기고, 내 어둠이 찢긴다. 나는 별안간 불을 켜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옷걸이로 다가가 메달을 집는다. 메달을 목에 걸고 거울로 향한다. 그을린 살갗의 사내가 메달을 목에 걸고 형광등 아래 우두커니 서 있다. "안녕?"  새삼스럽게 나에게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든다. 이를 보이며 빙긋 웃는다. 


 마라톤은 원래 내 주종목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가자마자 나는 단거리 선수로 육상부에 들어갔다. 비공식 기록이지만 가끔 100미터를 11초대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첫 출전한 전국 소년체전에서 은메달을 타오자 나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학교로 기자가 인터뷰를 나오기도 했다. 곧 내 이름 앞에 육상 꿈나무란 별칭이 붙었다. 책상에 앉는 날보다 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다리 괜찮아?” 육상 꿈나무란 별칭이 떨어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달려온 코치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의사는 다시는 단거리 선수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세 번째 전국체전이 고작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코치의 한숨과 어머니의 눈물에 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운동장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마라톤이라는 거야. 100미터처럼 미친 듯이 뛰지 않아도 돼. 계속 꾸준히 오래 뛰는 거야. 해볼래?” 보통 학생으로도, 단거리 유망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마라톤을 권유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뛰었다. 처음에는 열 바퀴를, 그다음에는 서른 바퀴를, 나중에는 몇 바퀴를 뛰는지 세지 않았다. 가끔 다친 다리가 뻐근했지만 다행히 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니던 학교를 떠나 전직 마라톤 선수가 코치로 있다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마라톤은 내가 도와줄 게 없어. 네 스스로 이겨내는 거지.” 비쩍 마르기만 한 전직 마라톤 선수는 알 수 없는 헛소리로 나를 지도했다.  


 뛰고 또 뛰다 보니 시간이 흘러갔다. 실업팀에 입단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다시 이름 앞에 별칭이 붙었다. 이번엔 마라톤 신예였다.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나의 몫은 그저 내 손목 박자에 맞춰 뛰는 것뿐이니 말이다. 가끔 옆을 지나는 차도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겨냈다. 또 가끔은 통증보다 강한 갈증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지만 아무에게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한 발짝 더 뛰었다. 


 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박기자에요. 이거 어떡하죠. 국장이 특집을 갑자기 바꿨어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기자에게 나는 괜찮다고 원하는 답을 주고 전화를 끊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승도 아닌 2등에게 굳이 특집을 줄 신문사 국장은 없다. 다만 입이 좀 썼다. 자고 난 입이니 쓴 법도 당연하다.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받아 마당 앞 텃밭에 쪼그려 앉은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 그게 뭐예요?” 

“우거지 만들려고. 이거 다듬어서 잘 말리면 그게 우거지야.”

“우거지로 뭐 끓이시게?”

“너 이제 집에서 빈둥거릴 일만 남았는데 오랜만에 육개장 끓여놔야지.”

“백수 아들 굶기지 않으려고 우리 어머니가 고생이네.”

“그러게. 저기 뒤쪽에 가서 대야나 좀 가져와라.”


 가을 우거지로 끓이는 육개장은 나와 작은 누나가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우리 집 별식이다. 간만에 어머니 육개장을 먹을 생각을 하며 내 방 창문이 보이는 창고 쪽으로 걸어간다. 촌스럽게 새파란 대야 하나를 들고 다시 걸어나오니 창문 밑 흙바닥에 알 수 없는 꽃이 하나 피었다. 가을꽃이라곤 코스모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노란 꽃잎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잠시 멈춰 한참을 보다가 다시 대야를 들고 앞마당으로 간다.  


 미친 듯이 달렸던 춘천 마라톤은 내 은퇴 무대였다.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할 거라고 주변에서는 응원이 대단했다. 정작 사람들의 함성을 터트린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주자였다. 모든 기자들이 1등에게로 달려가 말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코치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다. “


 다음 날 집에 들어온 신문에는 춘천 마라톤 우승자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의 얼굴이 다른 신문에도 실려 있던 오전, 나는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고 마라톤 실업선수의 생활은 드디어 끝을 맺었다. 박기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다음 주에 밥을 사겠다고 했다. 


 우거지가 달큼하게 녹아있는 육개장을 한 그릇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옷장을 열고 선수복을 꺼냈다. 거울 앞에 다시 섰다. 코가 시큰거리고 거울 속 형상이 이지러졌다. 마지막 무대가 우승이었다면 아버지 스크랩북이 한 장 더 늘었을지 모른다. 코가 더 시큰거린다.


 방문을 열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여진다. 창문을 넘어 들어서는 햇살의 몸뚱아리는 점점 커져간다. 문득 어제 본 창문 너머 노란 들꽃이 생각난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을 들꽃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까 생각한다. 할 일이 이렇게 없나 실실 웃음이 난다. 방문을 연다. 햇살이 머리 위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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