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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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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Mar 31. 2016

열넷. 연애소설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가요?

지갑 속엔 아직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던 미연의 눈엔 눈물이 고인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 머문다. 잠시 머물던 눈물은 미연의 손등에 쓸려 자취를 감춘다.


수요일 오전 11시, 기차 안은 정숙한 고요에 싸여있다. 미연은 서둘러 지갑을 가방에 넣는다. 입술을 포개어 잇몸으로 꽉 눌러본다. 다른 승객의 아늑함을 깨지 않기 위해 미연은 아예 눈을 감는다.


‘괜찮아’


오른쪽 귀를 유리창에 대며 미연은 생각한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하나 둘 달라붙는다. 기차를 따라 구름이 따라간다. 하늘은 이미 쪽빛이다. 쪽빛 허공에서 빗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진다.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진공관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수요일 오전 11시 대전행 기차는 점점 고요해진다.


미연은 유리창에서 몸을 일으켜 반듯하게 의자에 앉았다. 유리창을 식힌 빗방울 때문인지 미연의 귀는 서늘해졌다. 가방을 다시 열어 이어폰을 꺼낸다. 기차의 정적을 깨고 미연은 홀로 익숙한 노래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참, 내게는 참, 그런 사람

“종강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떠나려고. 하루라도 더 보고 와야 나중에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아서.”


우진은 여름 방학 내내 유럽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들떠있는 표정은 미연에게도 또렷이 보였다. 미연은 차마 서운한 마음을 말할 수 없어 연신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묻혔다.


“몇 개국이나 갈 건데?”

“글쎄, 정하진 않았어. 발길 닿는 데로 가볼까 생각 중인데.”

“그래도 대충 어디 어디 갈지 정해둬야 하는 거 아냐? 숙소도 정해야 할 테고”

“무언가 정해두면 재미없잖아.”


빨간 국물을 흠뻑 빨아들인 순대를 입에 넣고 미연은 최대한 천천히 순대를 씹었다. 미연은 방학 때마다 대전에 내려가서 지냈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대전 집에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우진과 자주 볼 생각이었다. 우진은 서울을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우진 없이 혼자라도 학교에 나와 책이라도 읽어야 하나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나 미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연아, 대전은 언제 갈 거야?”

“아직 안 정했어.”

“종강하는 날 갈 거면 내가 데려다주게. 어차피 공항까지는 어머니가 데려다주신다고 해서 네가 안 나와도 될 것 같고”

“그래.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나 유럽 가면 너 보고 싶어서 어쩌지?”


미연은 마지막 떡볶이를 입에 넣는 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우진에게 말했다.


“그럼 가지 마.”

“응?”

“가지 말라고. 나 보고 싶으면 유럽 안 가면 되지.”

“흐흐흐 너 서운하구나. 대신 다녀와서 매일 보자. 가서 내가 자주 연락할게.”


중간고사가 끝나자 시간은 더욱 빨리 가기 시작했다. 리포트 제출에, 조모임에, 기말고사 준비까지. 새내기를 벗은 만큼 우진과 미연도 바빠졌다. 수업이 같아 늘 붙어 다니던 작년과는 다르게 전공선택을 한 후에는 각자 수업을 듣는 일이 늘었다. 어느 날은 시간이 맞지 않아 따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바쁜 날들도 금세 지나고 드디어 마지막 시험일이 되었다.


거시경제학 기말고사를 마지막으로 미연은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탓인지 누군가 머릿속 모든 것을 진공청소기로 싹 비워낸 느낌이었다. 미연은 우진이 시험을 보는 K관 입구에서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우유를 절반쯤 마셨을 때 부산스러운 의자 소리가 들리더니 학생들이 떼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진이 보였다.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떡볶이 먹으러 갈까?”

“너 오늘 대전 안 가? 나 너 바래다주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떡볶이는 먹고 가자. 난 대전 가고 넌 유럽 가면 한동안 못 먹잖아.”


빠알간 국물에 쌀떡볶이가 가득 담긴 접시가 하나 놓였다. 뒤이어 가지런히 썰린 순대와 간이 다른 접시에 놓여 나왔다. 미연은 순대를 포크에 찍어 떡볶이 국물에 담갔다. 우진은 떡볶이를 연이어 입에 넣더니 찬 물을 들이켰다. 더위가 한층 거세지는 6월 중순의 떡볶이 데이트는 생각보다도 더 습하고 더웠다.


‘우리 기차는 곧 대전역에 도착합니다.’


익숙한 안내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기차 안 고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외투를 입고 머리 위에서 가방들을 내리느라 부산스러웠다. 미연도 이어폰을 빼고 가방을 들었다.


기차가 서자 문이 열렸다. 플랫폼엔 다행히 비가 묻어있지 않았다. 역 안으로 들어가 미연은 늘 그랬듯 성심당 쪽으로 향했다. 평일 낮 시간에도 빵을 사려는 사람들은 많았다. 익숙하게 줄을 서고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정면에 국수집이 보였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대전에 올 때마다 국수집을 봐야 한다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진은 매번 대전역까지 미연을 바래다줬다. 다시 서울을 올라가야 하는 우진을 위해 미연은 매번 국수를 시켰다. 밥보다 면을 좋아하는 우진에게는 딱 알맞은 맛집이었다. 두 사람은 멸치국수 두 그릇을 시켜놓고 집에 가는 시간을 늦추기 일쑤였다. 따뜻했던 국수만큼이나 따뜻했던 시간들이었다.


“진짜 웃긴다. 그래서 혜정이가 뭐라고 했는데?”

“그게 대박인데, 와, 나 정말 혜정이 다시 봤다.”

“뭔데?”

“조교님이 써도 저보다 잘 쓰실 것 같진 않은데 왜 제가 B등급이죠?”

“진짜야?”

“진짜야!”


누가 봐도 이제 막 화장을 시작한 것 같은 미연의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그런 미연의 손을 우진은 꼭 잡고 있었다. 비좁진 않았지만 워낙 의자가 많아 촘촘히 앉아 먹어야 하는 국수집이었다. 벚꽃이 질 무렵의 계절이었다. 미연의 국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우진은 한 그릇을 비운 채 미연의 국수를 덜어 먹었다.


“우진아, 국수가 그렇게 맛있어?”

“나 국수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이 집 국수는 희한하게 맛있네.”

“그럭저럭 괜찮긴 한 것 같은데”

“알았다. 너 집에 일찍 보내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그게 뭐야?”

“나 네가 남긴 거 다 먹을 테니깐 나랑 조금만 더 있자.”


미연은 활짝 웃으며 우진을 쳐다본다. 우진은 꾸역꾸역 미연이 못다 먹은 국수를 후루룩 넘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전역을 스쳐가고 해가 좀 더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둘은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남자가 웃다 여자가 웃더니 여자가 웃다 남자가 또 웃었다.    


“손님,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튀김소보로랑 부추빵 세트요.”

“네. 만 원입니다.”


빵 봉지를 들고 택시 승차장으로 향했다. 가을비에 서늘해진 택시 안 공기가 빵 냄새로 뒤덮였다. 다행히 택시기사는 아무 얘기도 걸지 않았다. 적어도 미연만한 딸이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택시기사는 교통방송이 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이유 없이 줄였다 키웠다를 반복하더니 도착했다고 말했다.


지퍼를 턱 밑까지 바짝 끌어올린 검정 점퍼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원래 그의 몸에 부착되어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차 문을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미연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빠!”

“아오,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다.”

“하하하 진짜 우리 아빠는 못 말려”

“소보로 사왔구나. 역시 우리 미연이밖에 없어”

“엄마 집에 있죠? 비 오는데 뭐해요, 같이 들어가요. 아빠”

“엄마 너 먹인다고 고기 사러 갔어. 난 요거 기스 난 것만 해결하고”


문을 열자 집 냄새가 난다. 겨우 두어 달 만인데도 집 냄새가 반가워 미연은 한참을 거실에 서 있다 주방으로 향했다. 성심당 빵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냉장고를 열어 물통을 꺼냈다. 길쭉한 흙색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르고 보니 식탁에는 못 보던 종이가 코팅되어 놓여 있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우진은 미연에게 문자를 남겼다. 둘째 날에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 다음날에도 우진은 민박집에서 미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오늘 본 공연이 정말 좋았다고 꼭 같이 보러 오자고 말이다.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후에 우진은 우연히 일행을 만났다. 꺼내는 주제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독일을 거쳐 프라하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진은 애초에 동유럽은 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가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일행과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우진은 미연에게 빠지지 않고 연락을 했다.


프라하는 생각보다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일행과 함께 도착한 한국인 민박집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집에 도착한 다른 일행은 때마침 강도를 당했다고도 했다. 인터넷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진은 미연에게 이메일을 쓰고 싶었지만 다음 목적지인 빈에 가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빈으로 넘어온 우진은 일행과 헤어졌다. 한동안의 동행이 이제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던 찰나, 일행 역시 스위스로 향하겠다고 했다. 마땅한 민박집을 찾지 못한 우진은 호텔이 많은 거리로 향했다. 필요할 때 쓰라고 주신 어머니의 카드로 체크인을 한 뒤 방으로 향했다. 트램이 오가는 거리 쪽으로 창문이 있는 방은 금방 청소를 한 탓인지 쾌적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한잠을 자고 근처 카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다음 날, 우진은 미술사 박물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식당에 들러 슈니첼로 저녁을 해결했다. 다음 날엔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클림트의 키스 앞에 서 있다 문득 이메일 생각이 났다. 한국시간에 맞춰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이메일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날 저녁 우진은 미연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썼다. 무언가 숙제를 해결한 것 같아 더욱 피곤했다. 빈을 떠난 우진은 스위스, 이탈리아, 모나코를 거쳐 니스 해변에 앉아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태양이 해변을 비추고 있었다. 해변에 누워 우진은 미연을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여행을 오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했다.


“미연아, 엄마 좀 늦는다는데 아빠가 실력 발휘해볼까?”

“삼치구이?”

“넌 역시 귀신이야. 한 20분만 있다가 차고로 와라.”


책상 위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그 책이 꽂혀 있었다. 미연은 책상에 반듯하게 앉아 책을 꺼낸다. 겉표지를 넘긴다. 우진의 글씨가 보인다. 사랑한다는 글씨도 아직 지워지지 않고 그 자리에 쓰여 있었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니?'


8월 초에 돌아오겠다던 우진은 결국 8월 말이 되어서나 돌아왔다. 돌아오는 날 마중 나가려고 했던 미연은 공항에 가지 못했다. 모든 것은 이메일 한 통에서 비롯되었다.


미연아, 기분이 이상해.
네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부터 내가 널 생각하지 않더라.
미안해. 계속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할 것 같아.


미연은 답장을 하지 못했다. 대신 이메일을 지웠다. 대신 같은 하숙집에 있는 동우를 불러 자주 술을 마셨다. 대신 매일 밤 하숙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속 울었다. 그게 다였다.


우진은 가을 학기에 복학하지 않았다. 미연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미시경제학 시간에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옆에 앉은 학생이 놀란 얼굴로 휴지를 건넸다. 미연은 하숙집으로 가던 골목을 바꿨다. 5분이나 더 돌아가야 하는데도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 대학도 전학이 가능하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미연아, 이 책 아직 안 읽었지?”

“응. 그거 너무 어려워 보여.”

“그럼 나 이거 선물해줘. 내가 다 읽고 너한테 다시 줄게.”


우진은 정말로 책을 다 읽은 뒤 맨 앞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감상문을 적어 미연에게 책을 건넸다. 작년 가을 학기에 미연은 대전 집으로 책을 가져왔다. 가끔 대전에 와서 우진이 보고 싶을 땐 미연은 맨 앞장에 반듯하게 서있는 우진의 글씨를 읽었다.


농담. 미연은 책 제목을 따라 읽었다. 이제 정말 껄렁한 농담처럼 되어 버린 그 시간들을 밀란 쿤데라는 알고 있을까 생각했다. 가방을 열고 지갑 속 사진을 꺼냈다. 근엄한 밀란 쿤데라의 얼굴 위에 사진을 올렸다. 5분 뒤, 조각이 난 사진은 퍼즐처럼 밀란 쿤데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삼치구이의 기름진 냄새를 미연은 좋아한다. 차고로 향하자 20년은 더 된 것 같아 보이는 화로에 연탄이 쑤욱 미끄러져 들어간다. 매캐한 냄새가 차고를 덮지만 미연과 아버지 둘 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역시 생선구이는 연탄이 최고야. 미연아, 내숭 떨지 말고 푹푹 떠먹어라.”

“내가 언제 아빠 앞에서 내숭 떨었나. 밥 이리 주세요.”

“너 이 연탄이 얼마나 심오한 놈인지 알아? 이놈이 처음에는 검고 차갑지만 나중엔 살색에 뜨끈하단 말이지. 봐봐. 사람 알몸 같지?”

“아, 그만해. 밥 먹는데 이상한 소리 하시네.”


적당히 그을려 먹기 좋게 익은 삼치 두 마리가 접시 위에 올려졌다. 미연이는 주방에서 가져온 김치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버지는 삼치 한 마리를 접시 위에 더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니가 똑똑한 척 해도 별 수 있겠냐. 누구나 처음 만날 때는 힘든 법이야.”

“아.빠.”

“원래 연애가 다 그래. 이렇게 다 타버린 연탄처럼 따뜻한 마음만 남기면 그걸로 된 거야.” 

“우리 아빠 외로운가 봐.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

“삼치 더 먹을래?”


아버지는 삼치 한 저분을 덜어 미연의 밥 위에 올려줬다. 미연은 순간 목이 메었다.


“연탄 연기 때문에 눈물 나잖아요. 다음엔 그냥 가스렌지에 구워 먹어요.”


가을 비는 이틀이나 더 왔고 미연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오는 길에 미연은 대전역 쓰레기통에 농담을 던져버렸다. 홀가분하다 휑하다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서울행 기차에는 사람이 많았다. 미연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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