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세 아이의 엄마.

마지막.

by dodamgaon


어린 동생은 뭘 하든 간에

날 따라 하는 여동생이 어갔다.


내가 긴 파마머리를 하면

여동생은 단발 파마 머리고,

내 옷이 작아지면 그걸 물려 입었다고 했다.

그 모든 것들을 엄마는 사진으로 남겼다.


이 아이는 커서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어

회사마저 내가 다녔던 회사로 입사했다.

그러다, 4년을 다니던 동생은 나보다 일찍 퇴사를 했다.


그렇게 여동생을 포함해

네 식구가 된 우리 가족.


강원도에서 회사를 옮긴 아빠를 따라

광명시에 어느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취한 취객이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들어.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엄마는 프라이팬 든 채

아빠는 맨 몸으로 우릴 지켰다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엄마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고 했다.


세 번째도 여자애면 그냥 안 낳다고 마음먹었는데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병원을 가게 됐다고 했다.


검사 후 의사 선생님이

"아들입니다" 듣고는

할아버지와 아빠의 기쁨에

낳기로 정했다고 했다.


그렇게 막내가 아들로 태어나자,

막내는 자라면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며 자라게 됐다.


장을 봐야 되는 날에 밖을 나면.

엄마는

나랑 여동생을 한 손에 하나씩 손을 붙잡.

막내는 등에 업은 채

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시내 쪽을 나오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고,

버스를 타면 기사님이 안 좋은 말을 했다고 했다.


이 당시.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 하던 시대였에 더 했다고 했다.


어느 날 아빠의 월급이 밀리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엄마는 막내를 등에 업은 채

그 당시 압류 딱지를 붙이는 아저씨들의 차에 타

사장의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무슨 자신감에 따라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빨간색이 집 안 곳곳에 붙여지자,

그제야 월급을 안 주던 대표는

빠른 시일에 돈을 주겠다고 하고선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가끔 그때가 생각나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따라갔어"

라고 얘기했다.


한문에 푹 빠 초등학생 1학년 렵,

아빠는 형의 요청에 같이 회사를 차리게 되었고,

그렇게 다섯 식구는 김포에 정착하기 이르렀다.


"해물동네"


바로 1층이 해물찜 가게라 그 간판이 제일 눈에 띄었다.

2층에는 단 3세대만 사는 그런 구조였다.


초등학생인 날 배웅하고 나면

가까이 사시던 작은할아버지의 명의 고모들에게 남동생을 맡기고,

여동생. 손을 잡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뒤에 있는

유치원에 맡기고 집에 돌아갔다고 했다.


여동생은 울기는커녕.

바로 뒤돌아 친구들한테 달려갔다고 했다.


집에 온 엄마 품에 막내는 잠들었고,

엄마는 막내를 품에 안은 채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이란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했다.


이때 가장 핫했던 "리리카 sos" 팔찌 모형에

스티커를 붙이는 일이었다.


엄마는 점차 부업의 도사가 면서부터

세 아이, 제 자식들을 위해 살게 됐다.

그러다. 내가 잠자리를 잡은 채 집 앞에서 잠자리 날개를 찢어 버렸고, 건물 벽에

"잠자리야 날개를 찢어서 미안해"라고 적었다.


그걸 발견한

엄마는 다음부터는 함부로 잡지 말라고 했다.


형의 회사를 나온 아빠는 다른 회사로 취직했고,

그렇게 인천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엄마는 더더욱 생활력이 강해고,

아빠는 더더욱 책임감 커졌고,

그렇게 두 분은 열심히 살아왔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로 자라 오던

내 눈에 비치는 부모님은

커다란 산과 하늘 같다.


30대에 들어서

내 눈 비치는 부모님은 많은 세월에

안 보이던 주름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20대의 청춘.

30대의 꽃피는 시절을

지나,

쭉, 우리 셋을 키우는데

쓴 부모님의 젊음이

지금은 너무나도 미안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녀에서 첫째 아이의 엄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