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프 May 31. 2020

헛소리병

 나는 지병이 있다. 긴장했다 싶으면, 맘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헛소리병'..


 어 땐 단어로.. 어쩔 땐 문장으로.. 나온다. 후유증은 다양하다. 자꾸자꾸 생각나서, 가끔 ㅁㅊㄴ처럼 혼자 설겆이 하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박장대소를 한다. 어쩔 때는 귀신씐 여자처럼 눈이 돌변해 욕을 해대기도 해.. 어쩔 땐 내 머리를 벽에 박는 자해를 ㅠ하싶어지기도 다.


 합병증도 있다. 헛소리를 지껄인 후.. 제정신이 들고.. 아차 싶어지면 어김없이 합병증이 터진다. 증상은..이미 어색해져버린 공기 사이에서 '바보같이 웃기'이다.


가족이나 편한 상대와 있으면 이 병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꼭.. 직장! 어려운 자리! 중요한 자리!에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이 ㅈㄹ같은 병이 나온다.

  

내 인생은 이 지병과 합병증이 나은 걸작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에피소드 1

 학교에 첫 발령났을 때 모든 초등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긴장이 됐다. '잘해야지!!' 하고 시작을 했는데..

"안녕하세요. 액면가는 좀 있지만 신규입니다."

 방금 제가 뭐라고했죠?  (사진 출처: 한끼줍쇼)

WAHT!! 액면가라니.. 액면가라니!!  난 분명 '나이는 있지만'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내가 좀 개구지게 생겼으면 참 좋았을 것을.. 난 누가봐도 딱 진지하게 생겼다... 아무도 웃지 않았고.. 내가 던진 말은 싸늘한 공기에 흩어졌다. 이건 정말 후유증이 오래갔다.


*에피소드 2

 올해 3월 새 학교로 발령이 났다. 며칠 전 교감 선생님께 처음으로 대면 결재를 받으러 갔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교감님과 마주하는 순간...

  '후.. 왜 이렇게 긴장되지.. '

교무실 밖에서 크게 호흡 3번하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갔다.


교감님께 짧게 눈인사를 하고 결재서류를 들이 밀었다. 서류 내용을 설명드렸다. 이제 교님이 서류에 싸인만 하면 된다. 곧 이 긴장되는 곳에서 탈출이 가능하다. 바로 그때.. 교감님이 어색함을 깨고 싶으셨는지 한마디를 던지셨다.

 

"우리 학교 오더니 예뻐지신 것 같네요. 우리 학교가 좋아서 그러나?"

"네 학교 분위기가 정말 좋습니다." 분명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은..

"네 학교 물이 좋네요."

정신은 벌써 안드로메다...여긴 어디? 나는 누구?(사진 : 픽사베이)

 WHAT!!! 물이라니..  물이라니!!!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 합병증이 터졌다.. 또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교무실을 너무 후다닥 나오느라 교감님이 무표정이였는지 웃고 계셨는지 생각이 안난다. 후유증 2주각..


*에피소드 3

 작년에 수업연구대회라는 교사로서는 큰 대회에 나갔다. 어찌어찌해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좋은 성적을 받은 교사들은 그간 어떻게 연구했는지 PPT를 만들고 발표를 해야 된단다. 70~80명 되는 동료교사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된다. 긴장된다 긴장되..


 발표날 당일. 나의 긴장한 얼굴을 봤는지 다른 발표자들이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주기도 했다. 드디어 내 차례.. 마이크를 잡고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를 시작하고 중반쯤.. 연습을 많이 한 덕분인지.. 내 1년 짜리 프로젝트를 차분히 잘 설명하고 있었는데.. 내가 수업에 사용한 남자 아이 인형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다.


  "장애학생은 누구를 가르쳐 본 경험이 많이 없습니다. 배움은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내재화 되고 정점을 찍잖아요. 그런 경험을 제공해 주기 위해 인형에게 문제풀이 과정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진심으로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그런데 긴장된 나머지 또 헛소리를 지껄였다.  

 "제가 사용한 남자인형은 성교육용 남자 인형였는데 바지가 너무 쉽게 벗겨져 애를 먹었습니다. 학습자료실에서 가져오실 때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꼭 바느질로 꼬매주세요."(...' 꿰매다'라고 하지 않고 사투리를 쓴 것 같다;;)

WAHT!! 여기 저기서 큭 소리가 났다. 여러 학교 교감님도 앉아 계시고 장학사, 장학관, 연구사님들도 앉아 있는 공식적인 자리였는데.. 마이크에 대고 무엇을 지껄인 것이냐. 나는 또 정신없이 헤헤거렸다.

정말 내 입을 꼬매고 싶다(사진:픽사베이)


  그런데 난 이 '헛소리병' 때문에 작은 깨달음 같은 걸 얻었다.

나의 이 ㅈㄹ같은 헛소리병 처럼 ... 타인도..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툭 튀어나온 말이 있지 않을까?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되내이는 후유증에 시달려 너무 괴롭지만.. 자신의 병증과 후유증을 의식하지 못한 축복받은 사람도 있겠지..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니가한나쁜짓이다너에게돌아가길바래" 이 비수를 조금 너그럽게 쓰기로 했다.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도 실수일 수 있으니.. 또는.. 나처럼 .. 아무말대잔치하는 지병일 수 있으니...


*제목 배경 사진출처: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고슴도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