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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는 하교 후에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에 머무는 학생들이 많다. 1, 2학년이 대부분인데, 30분 이상 도서관에서 대기해야 할 경우 책을 싫어하는 학생들은 똬리를 틀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지겨운 내색을 하며 견딘다. 특히 신입생들은 이 낯선 공간과, 아직 친구라기에도 어색한 동급생들 사이에서 물 위에 떠있는 기름 같다. 바로 이때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 아니, 사서가 도서관 '단골멤버'를 영입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오늘 무슨 방과후 수업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셋 중 한 명은 자신이 지금 무슨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몇 시에 이곳을 나서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엄마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동문서답하는 아이들의 이름과 학번을 묻는다. 다행히 방과 후 담당 행정원의 도움을 동원해서 두세 번의 탐문조사 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다. 그리고 신입생들을 안심시킨다.
"25분 더 기다렸다가 출발하면 돼요~ 그럼… 기다리는 동안 재미있는 그림책 하나 읽어줄까요?"
처음에는 대부분 싫다고 대답하지만 관객은 딱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심심한 녀석들은 그림책 읽는 소리에 하나 둘 자석처럼 다가오기 마련이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1, 2학년은 방과 후 수업 시작 시간도 기억하고, 책을 읽어달라며 사서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주 수요일의 일이다. 말 한번 잘못 걸었다가는 콱 깨물릴 것만 같은 사나운 눈빛을 장착한 1학년 아이가 하교 후 도서관 문을 들어섰다. 고개를 45도 옆으로, 뒤로 흔들어 대며 눈을 삐딱하게 내리깔고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슨 이유인지 마음이 한껏 삐뚤어진 상태가 확실하다. 함께 온 다른 아이는 눈치 없이 책을 읽어달라며 내게 해맑게 웃었다.
보통은 이야기 그림책을 골라 오는데, 이 여학생은 식물을 좋아한다며 자연관찰 책을 골라왔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잎이 나서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 과정과 식물의 미세한 움직임을 간단한 글과 함께 그림으로 알려주는 좋은 책이었다.
"선생님! 씨가 땅에 떨어지면 다시 또 뿌리가 내리는 거죠~?"
좋아하는 식물 이야기에 신이 난 아이와 달리 기분이 안 좋은 아이는 삐뚜름히 딴지를 건다.
"칫… 이런 거 다 알아요."
식물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하는 자랑의 말들이 퇴색돼버린다. 기분이 안 좋은 학생 + 재미가 보장되지 않는 자연관찰 책의 조합이라… 새로운 시선을 끌어내야 할 타이밍이다.
"식물이 자라는 데는 물과 햇빛과 자랄 공간이 필요하대! 음~ 우리도 식물처럼 자라는데 꼭 필요한 게 있지 않을까? 어떤 게 있을까?"
두 여학생이 처음으로 동시에 왼쪽으로 눈알을 굴리며 고민을 시작한다.
"공부?"
“그렇지~ 자라는 동안 공부가 큰 도움이 되지~ 또?“
"음… 연필?"
“좋아~ 공부하려면 연필도 꼭 필요하지! 또?”
"아… 책!"
옳거니.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선생님이라는 상대 앞에서 아이들의 사고가 '정답'을 찾는 딱 거기에 갇혀있다. 생각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살짝 더 개입해 본다.
"선생님은… '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 두 학생의 눈이 동시에 커다랗게 동그래진다.
김치, 옷, 이불…. 더듬더듬 자신들 주변에 존재하는 의식주를 나열한다.
"그럼 우리 차례대로 말해볼까? 내가 자라는데 꼭 필요한 것이 뭐가 더 있는지~"
셋은 시계방향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신발, 양말, 집, 과일, 물…. 두 학생은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었던 문제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식물 그림을 뚫어지게 보며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하고 있는 아이들의 생각을 한번 더 넓은 곳으로 잡아끌기 위한 미끼를 던져본다.
"선생님도 필요하지!"
오~! 맞아~! 녀석들의 머릿속은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 언니, 친구, 할머니, 이웃…. 세상 진지하다.
책을 3, 4장 정도밖에 못 읽었지만 빨리 다음장으로 넘기라는 재촉 따위는 없었다. 정말이지 책이란 것은 꼭 첫 장부터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읽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책을 다 읽어야 오롯이 얻을 수 있겠지만 작가는 독자의 지금 상태나 욕구를 알리 없지 않은가? 독자에게 필요한 통찰의 순간은, 장면은 독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누고 싶은 주제에 집중하고 깨닫는 경험이 중요하다. 아이가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엮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효용가치를 경험하는 것이 책을 한숨에 끝까지 읽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들의 질문 때문에 자꾸 옆길로 새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이가 엄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 막 떠오른 것이다. 그러면 옆길로 비켜서서 아이의 생각을 펼쳐주면 된다. 책은 생각을 끄집어 내어 상상의 크기만큼 키워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책을 백번 읽어도 백번을 다르게 읽어내는 아이들의 상상력은 그래서 위대하다.
시계를 흘끔 보니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급히 풀어헤친 생각들을 갈무리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와~ 너희가 자라는데 꼭 필요한 것이 정말 많구나! 여태 말한 것들 중에 지금 없거나, 부족한 것이 있니?"
자신이 경험하거나, 가진 것들을 신나게 말했으니 없는 게 있을 리 없다. 어느새 사납던 아이의 눈빛이 순한 양처럼 내려앉아 있다. 녀석은 가슴 가득 부자의 의기양양함을 담고 방과 후 수업을 하러 떠났다. 식물을 좋아한다던 아이는 책의 남은 페이지를 흘끗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 보물이라도 되는냥 가슴에 끌어안길래 대출해 줄까? 물으니 선생님 책상에 보관해 두라고 한다. 내일 나머지 부분에 대해 꼭 함께 이야기 나눠야 한다나 뭐라나…. 이 책 아무래도 한 달은 읽겠다. 단골멤버 두명 확보 성공!
시간이 허락했다면 아이들이 방금 한 말들을 대신 받아 적어 읽혀줬을 것이다. 보통은 자신들이 한 말을 글로 다시 읽으면서 깜짝 놀란다. 기뻐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적는 것을 시도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매일 더 나은 자신이 되고싶어 움튼다.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이 나면 꽃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리듯이 자신의 경험을 나눌 것이다.
도서관에서 성장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그 한가운데에 사서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