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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도서관

by 느닷

“선생님~ 진짜 도서관에 와서 책만 읽어도 돼요?”

“응~ 방학 동안 15번 오면 돼요. 읽은 책 제목은 적어야 해요, 기왕이면 친구랑 같이 오세요. 그럼 방학이라도 오며 가며 친구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잖아~”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도서관 15일 방문하기' 행사를 진행했다. 책 읽기에 시큰둥한 아이들도 ‘친구랑’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방학 동안 학교도서관에 방문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독서를 한 사람에게 확인도장을 하나씩 주는 행사였다. 더불어 독서 빙고 판에 적혀있는 다양한 주제 분야의 책을 골고루 읽고 3줄 빙고를 완성하면 미션 성공이다. 성공한 아이들에게 개학하는 날 과자 세트를 선물을 약속했다. 방학 전부터 다단계 영업처럼 친구의 친구가 친구를 데리고 와서 참여 예약을 했다. 꾸준한 독서습관과 다양한 독서경험을 끌어내기 위한 이벤트이지만 사실 초등학생 중에 한 시간 내내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그래도 한 시간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방학에도 바쁘기만 한 아이들이 도서관에서라도 친구들과 함께 유유자적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잉여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방학 때 친구를 최소 15번 만날 기회를 스스로 덥석 물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도서관을 방문한 아이들이 처음에는 책을 좀 읽지만 대부분 40분 전후로 고개를 들고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한다.

“니는 또 축구책만 읽나? 이 만화책 읽어 봐봐! 진짜 재밌다! 방학 숙제 많이 했나? 오늘 왜 이래 늦었는데? 니는 마치고 뭐 할 건데…?”

근황 토크와 관심사 체크 등으로 주의력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친구와 주파수가 잘 맞는 날은 더 적극적으로 사교활동을 시도한다. 친구 없이 온 아이은 다른 아이들의 대화 중에 끼어들 타이밍을 잰다.

“이 책에 그림 진짜 예쁜데 봤나? 여기 이런 책 있는 거 아나? 내가 읽어줄 테니까 잘 들어봐라이! 니 그거 아나? 내가 저 책에서 봤는데~ 신기한 거 보여주께 일로 와봐.”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친구가 좋아할 만한 제안을 해 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만 알고 있(다고 믿)는 고오급 정보를 나누면서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다. 독서는 슬슬 사교의 강을 건너 아이들을 슬기로운 소통탐구 영역으로 데려간다. 나는 아이들의 이러한 잡담 역시 독후 활동의 한 부분이라 인정하고 한 시간 독서확인 도장을 콩 찍어 준다. 아이들은 도장을 받아 들고 친구 손을 맞잡은 채 의기양양하게 도서관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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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나야 한다. 옛날에는 뒷동산에서 수시로 만나 뛰놀며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자연을 탐험했다. 골목길에서 수없이 만나 겨루고 다투며 관계를 배웠었지만 이제 다 옛말이다. 아이들은 우레탄 깔린 탄성 좋은 놀이터와 CCTV 달린 학원 이외에 사람을 안전하게 만날 장소가 없다. 아, 시간도 없다. 자연은 커녕 개미, 파리도 구경하기 쉽지 않은 청결한 환경 속에 살다 보니 교실에 벌이나 잠자리 한 마리만 날아들어도 학교가 무너질 듯 놀라 자빠지고 난리가 난다.


아이들이 성장하려면 나와 가족 이외의 누군가와 무시로 만나 상호작용을 해 봐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과 목소리는 내 언어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반응을 관찰하고, 옆 사람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듣는 경험을 해 봐야 한다. 대화 중에 어떤 손짓이나 표정이 유용한지 써먹어 봐야 한다. 어떤 주제로 대화할 때 즐겁거나 유익한지 알아내야 한다. 같은 시공간을 사는 다른 생명체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해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해, 공감, 소통, 성찰 따위를 할 힘을 기를 수 있다.


사람과 말을 해 봐야 말이 늘고, 말이 늘어야 글도 늘고, 글을 써봐야 더 고차원적 사고를 하게 된다. 더 나은 글을 쓰려면 독서가 필요하고, 독서를 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게 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이 모든 배움이 선순환한다. 혼자 하는 게임이나 손가락으로 주고받는 메신저로는 익힐 수 없는 배움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책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나’만 잘 알아서는 행복하기가 어렵다. 챗 GPT가 모든 질문에 답을 해 주고 의식주를 위한 예약과 주문이 모두 비대면으로 가능한 온라인 세상이 되면서 ‘남’과 소통해 볼 기회는 점점 더 귀해지고 있다.


학교도서관은 아이들이 '책'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나’와 ‘남’을 안전하게 탐색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재미를 발견한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도서관을 즐긴다. 스스로 책을 읽으며 좋았던 경험을 남과 나누는 속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란다. 나는 도서관이 역동적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계기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래서 여기 글빛누리도서관은 좀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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