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쁘고 어여쁜 그녀는 자그마한 개척교회 목사님 부인이다.소위 말하는 '목사 사모'인 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모두 기피하는 바로 그 직업이다. 우리 인연은 10년도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 당시 딸 둘 맘이었던 그녀는 몇 년 전까지 일했던 회사에 처음 입사 했을 때 나의 사수였다. 알고 보니 당시 신학대학 다니고 있는 남편 뒷바라지 하면서 집안의 가장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대찬 그녀는 비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입김 센 임원들의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간혹 대표 승인으로 우격다짐 받아야만 했던 낙하산도 인사평가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분명한 성과로만 평가를 했었다. 몇몇 회사를 거쳐 여기로 옮긴 소위 때 묻은 경력직이었던 내 눈에는 쉽지 않은 일을 기준 갖고 하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그리고 저 사람이라면 믿고 같이 할 수 있겠다. 는 신뢰가 한순간에 채워졌다.
하루는 내가 지치고 또 다른 하루는 그녀 어깨가 서러워 보일 때 커피 한잔, 밥 한 끼로 조그만 위로들을 건네며 서로 마음을 돌봐주었다. 특히 남편 등록금을 내야 되는 때가 다가오면 그 작은 어깨가 더 작아 보였었다. 녹록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쉽지 않은 결혼을 택했지만 그래도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살아있었다. 사회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어른다운 어른을 보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뭘 보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몇 번 일을 시켜보더니 그 뒤부터 아예 맡겨버렸다.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녀의 인정이 한없이 고맙고 좋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녀는 배가 불러왔고 셋째 임신 소식을 알리고 퇴사를 했다. 이듬해 회사 근처로 셋째를 안고 찾아와서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또 배가 이상한 것 아닌가. "설마 임신한 거 아니죠" 했더니 씩 웃는다. 허거걱 내배가 불러오는 것도 아닌데 어쩌려고 그러나 걱정이 앞섰다. 자식을 3명 이상 갖고 싶다고 애가 둘일 때부터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실천을 해버렸구나 했다.
이후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깨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10년이 훌쩍 흘러 그녀는 1남 3녀의 엄마가 되었고 신학대학을 다녔던 남편은 대학원까지 마치고 목사님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필 그 어렵다는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양초 같은 사람이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환히 밝히고 그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여 기꺼이 감사함으로 즐긴다. 하지만 간혹 그 어깨가 안쓰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가는 그녀다.
몇 년에 한 번 서로 살아 있음을 깨톡으로만 확인했었는데 올해 꼭 보고 싶다고 했다.신기했던 건 얼마 전부터 나 또한 올해 가기 전에 꼭 찾아가야겠다. 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드디어 D-DAY.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예전 모습 그대로 거기에 서 있었고 너무나 반갑게 포옹을 했다.
올해 10월 4살 터울의 바로 위 언니를 척추암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임종을 지켰고 아픈 언니를 품에 안고 평안히 하늘나라로 인도하였다 했다. 나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할 거라고 말하며, 언니를 떠나보내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보고 살아야겠다. 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참 고마운 말이다.
항상 따뜻한 봄같이 품어 주었던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시간이 흘러 흘러 할머니가 된 그녀의 임종을 나도 지켜볼 수 있다면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평안히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그녀의 피땀과 눈물의 기도로 남편인 목사님은 각종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는 찬양사역자가 되었다.